각종 세미나를 할 때마다 정작 세미나는 설렁설렁 나오는 둥 마는 둥 하고 뒤풀이에만 줄기차게 ‘개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눈을 흘기면서도 내심 ‘그놈 참, 영악하군!’하고 감탄할 때가 있었다. 세미나 시간은 물론 보람차지만 사실 뒤풀이만 참석해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을 쉽고 재미있게(게다가 음주가무라는 최고의 양념까지 곁들여)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뒤풀이에서는 세미나 교재로 읽은 ‘책’의 내용 뿐 아니라 책이라는 ‘텍스트’를 둘러싼 온갖 사적/공적 ‘컨텍스트’가 만발한다. 저자에 대한 각종 ‘뒷담화’, 책이 탄생되기까지의 비화, 책을 읽으면서 ‘단지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책에 대해 투덜거리고 싶었던 것들’, ‘도무지 이해가 안 되서 미치겠다’는 식의 불평불만까지. 책 한 권을 읽고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세미나 뒤풀이는 책에 대한 말끔한 논리적 이해를 넘어 울퉁불퉁한 감성의 막춤을 위한 멋진 놀이터였다.
뒤풀이가 화끈한 세미나들은 대부분 어떤 공익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끼리 좋아서’, 혹은 ‘이 책이 좋아서’, ‘이 저자가 좋아서’ 모이고 결성되고 자유롭게 흩어지는 세미나였다. 요새는 그런 세미나를 찾는 것도 힘들고 신명나는 뒤풀이 문화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꼭 술이 들어가야 좋은 뒤풀이는 아니다. 책에 대한 ‘비공식적’ 수다를 자유롭게 떨 수 있다면, 커피 한 잔을 놓고도 얼마든지 멋진 뒤풀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뒤풀이 문화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문자언어로는 도저히 전달되지 않는 지식, 오직 ‘구전’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지식의 힘 때문이다. 누구나 책을 요약할 수 있고 중요한 대목에 밑줄을 치고 리뷰를 할 수는 있지만,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 지닌 감성의 필터에 책이 어떻게 침투하고 여과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얼굴을 직접 보며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가 아닐까.
영화 <여배우들>에서 이미숙은 의미심장한 말 한 마디를 던진다. 요새 배우들은 촬영할 때 도무지 ‘모이질 않는다’고. 술은커녕 밥도 같이 안 먹는다고. 그러다보니 선배들의 가르침을 들을 기회가 없고, ‘좋든 싫든’ 선배들이 자연스럽게 들려주는 일종의 개인 레슨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좋든 싫든 선배들의 말을 그냥 조용히 듣는 것. 나는 이것이야말로 지식이 흡수되는 가장 원초적인 루트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떻게 연기의 진정한 호흡을 연기학원에서, 혹은 연기교재를 통해서 배울 수 있겠는가.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시점에서 늘어놓는 갖가지 넋두리, 경험담, 충고, 뒷담화까지. 그 모든 ‘구전’되는 지식이야말로 알게 모르게 배우는, 좋든 싫든 자신도 모르게 몸에 흡수되는 지식이 아닐까.
연기 뿐 아니라 모든 지식이 그 ‘구전된 지식’의 힘으로 전수되는 것이 아닐까. 단번에 이해되는 지식도 있지만, 처음에는 너무 싫다가, 처음에는 이해조차 되지 않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삶의 나이테와 더불어 저절로 이해되고 나도 모르게 내 삶의 소중한 토양으로 자리잡는 지식이 있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 한 대화’ 속에서 발효되고 숙성된 지식일 때가 많다. 누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했다고 아무리 암기해봐야 소용이 없고, 책 속의 이야기가 나의 단단한 감성의 각질을 뚫고 들어와 그 감성의 피부에 흡수되어야만, 비로소 내 입으로 나만의 어휘로 떠들 수 있고, 내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이 된다. 한 사람의 삶의 냄새가 묻어 있는, 시각적 문자만이 아니라 오감을 모두 사용해야 얻을 수 있는 맨투맨의 체험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의 힘. 우리는 단지 책을 읽음으로써 ‘정보’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이야기’ 혹은 ‘주인공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 나아가 ‘우리들의 이야기’로 확장시킬 수 있는, 책에 대한 온갖 수다를 밤새도록 떨 수 있는 ‘북 메이트’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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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정여울
문학평론가, ‘나비’ 편집위원, 계간 <자음과모음> 편집위원. 2004년 봄 <문학동네>에 「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 <씨네21>, <출판저널>, <드라마티크> 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저서로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미디어 아라크네』, 『모바일 오디세이』, 옮긴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