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진아, 어젯밤 수능 점수가 잘 안 나왔다며 울고 있는 너를 훔쳐보았다. 집에 들어오자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더구나. 네 엄마도 한숨만 쉬면서 이번 수능 점수가 평균적으로 낮아졌다는 뉴스만 보고 있고. 재수를 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네 엄마는 말한다만 아직 결정이 난 것은 아니니 일단 두고 보자꾸나.
그런데 희진아, 솔직히 네가 왜 울었는지 아빠는 궁금하다. 열심히 노력했으나 그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울고 있는지, 혹은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울고 있는지… 혹은 처음엔 무슨 이유가 있었는데 울다 보니 이유 없이 계속 울게 된 것일까? 아빠는 네게 번지르르 한 위로는 해주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아니다. 단지, 네게 수능 때문에 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서 편지를 쓴다.
다시 한 번, ‘너는 울 필요가 없다.’ 앞으로도 어떤 점수, 시험 따위가 너를 울게 할 수는 없다. 수능 점수는 대학을 가기 위한 점수인데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좋은 대학이 좋은 직장을 가는 지름길이고 좋은 직장이 행복한 삶을 만드는 길이라면 너는 조금 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위 친구들, 선생님, 가족들, 티브이와 신문이 그렇게 떠들고 있으니,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이야. 누구나 당연히 말하는 사실은 절대로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누구도 말하기 힘든 것이야.
엄마와 나는 네 교육 문제에 있어서 의견 차이가 있어 많이 싸웠다. 너를 밤늦게 학원에 보내고 자정 무렵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게 하는 것도, 아침 보충수업을 받으러 학교에 일찍 나가는 것도 나는 싫었다. 그것이 네가 바라는 일이라면 좋겠지만 열여덟 살의 여자아이에게 억지로 그런 것을 권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삼 년만 참으면 다 된다고들 하지만 아빠는 그 삼 년이 네 인생을 가장 기억나게 하는 시간일 텐데… 라고 씁쓸하게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엄마와 약속한 것이 있어서 나는 묵묵히 네가 남들과 비슷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아 왔다. 나는 어차피 돈을 버는 사람이니까 네 학원비나 버는 게 맞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빠는 고등학교 밖에 졸업 못했고,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직장을 다니고 있다. 부자도 아니고 가난뱅이도 아니다. 그래서 아빠가 행복하게 보이니 불행하게 보이니?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좋은 대학을 졸업해서 좋은 직장을 나왔다고 하더라도 지금만큼 불행했을 것이라고. 그래, 아빠는 불행하다. 50평생 나는 내 삶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거의 없었다. 이 나이가 되면 매일 알람시계를 껐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린다. 나는 내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살아간다. 울고 있는 너를 보고 아빠는 고민에 빠졌다. 희진이가 불행해서 울고 있는 건 알겠는데, 나는 이렇게 불행해도 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일까? 앞으로 내 딸은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네가 걷기 시작하고, 말을 시작한 지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제 너는 수능 점수 때문에 울고 있었다. 내 딸은 왜 울고 있는 것일까? 아빠가 아팠을 때도 넌 울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조금 울었지만 어제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네가 수능 때문에 울 정도라면 앞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인생은 불행하다. 파랑새는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는 법이라지만, 내가 살아온 바로는 파랑새는 없다. 이대로 간다면 너는 점점 불행해질 것이다. 예전에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아이스크림 하나, 영화 한 편, 책 한 권, 노래 한 곡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높은 수능 점수가 필요한 것처럼 점점 더 많은 것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리고 너는 행복해지기 위한 그 모든 것들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불행해지고 말 것이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서 불행해지고, 좋은 직장에 가지 못해서, 좋은 남자와 결혼하지 못해서, 좋은 아파트를 사지 못해서 불행해질 것이다.
아빠는 희진이가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유명한 대학, 유망한 과에서 공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단지 네가 진짜로 바라는 것을 공부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빠는 아직도 내가 진정 무얼 하고 싶은지 모른다. 너는 엄마를 닮아서 훨씬 똑똑하니까 그걸 빨리 찾아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아차리기를 바란다. 그곳이 꼭 대학이 아니어도 좋다. 그곳이 꼭 우리나라일 필요도 없다. 그것이 꼭 무슨 전공이 아니어도 좋다. 선생님이나 의사 변호사 공무원이 아니어도 좋다. 돈이 안 되는 것이라도 상관없다. 평생 놀고먹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놀고먹을 수 있는지 궁리해보는 것도 환영한다. 아빠는 희진이가 남들과는 다른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그 무엇이 너를 불행에서 구해줄 것이다. 그 무엇이 너를 빛나도록 아름답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 무엇이 네 삶을 값지게 해 줄 것이다. 그게 무엇이냐고? 아빠는 모른다. 너는 내 것이었지만 이젠 내 것이 아니니까.
아빠의 삶은 불행하지만 너를 보면 행복하다. 내 피와 살이 엄마의 것과 반반 섞여 네가 되었다. 그래서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그러나 너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애초에 너는 나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이제는 나하고 함께 있는 것보다는 친구와 통화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는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너는 커 갈 것이고, 어느 녀석과 결혼을 할 것이고, 너를 닮을 아이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 너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빠는 다시 불행해진다. 네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근본적으로 나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짧기 때문에 불행하다. 뭔가를 바꾸려고 하더라도 용기가 없기 때문에 불행하다.
나는 네가 다른 것 때문에 울었으면 좋겠다. 네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때문에 울었으면 좋겠다. 수능점수 따위가 널 울릴 수는 없는 것이다. 엄마가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그따위 수능 점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기준도 아니고 행복을 결정하는 기준도 아니다. 진정 중요한 시험은 매일매일 너도 모르게 일어난다. 아빠를 봐라.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시험에 떨어져 버렸다. 수능 따위는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지만 나는 다시 돌아가 그 시험을 치를 수 없다. 진정 울어야 할 사람은 아빠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 울어야 할 사람은 나와 비슷한 어른들이다.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것으로 서열을 매기고, 인맥을 만들고, 부동산에 기를 쓰고 투자를 해 돈을 벌려고 하는 어른들이다. 어쩌면 그들도 매일매일 잠이 들 때 나처럼 마음속으로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서 서럽게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세뇌당해 더 이상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희진아, 너는 열여덟 살이다. 더 이상 어린애도 아니고 청소년도 아니다. 너는 성인이다. 아무도 너에게 네가 갈 길에 대해서 강요할 권리는 없다. 이 아빠마저도 그런 권리가 없다. 너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니까. 너는 완전한 하나의 인격체다. 너보다 훌륭한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너를 인도해줄 사람은 더 이상 없다. 너는 이제 네 마음대로 살 권리가 있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권리가 있다. 남에게 그걸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네게 이런저런 설교 따위를 늘어놓는 사람의 말을 절대로 듣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네 맘대로 살아라. 그게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그 무언가를 찾을 지름길이기도 하니까. 마음껏 실수하고, 세상의 끝까지 내몰려 비참해지고, 세상 최고의 환희를 맛보아라. 제발, 아빠처럼 살지 마라.
알겠니, 희진아? 너는 더 이상 수능 점수 때문에 울 필요가 없는 것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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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진
소설가. ‘나비’ 편집위원. 전자공학 박사과정을 중퇴하고 캘리포니아에서 유랑하던 중 돌연 소설을 쓰리라 결심한다. 2004년 첫 장편소설 『채리』를 자체 제작하여 온라인 판매를 했으나 400여 권이 남아 집에 차곡차곡 쌓아놓았고, 2005년 연작소설 『하트모텔』을 자체 출판하였으나 제목만 야하다는 주위의 원성을 듣고 『채리』와 함께 보관 중이다. 더 이상 책을 쌓아둘 장소를 찾지 못하던 중, 2006년 뉴욕에서 쓴 세 번째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를 문학상에 처음으로 투고, 제12회 한겨레문학상을 받는다. 인디 문화잡지 <보일라>(VoiLa)의 편집장을 지내며 30여 호의 잡지를 기획하였고, 2004년부터 지금까지 대안출판 프로젝트 ‘한페이지 단편소설’을 운영하면서 끊임없이 책을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