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에 대한 명상†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아마도 일곱 살, 혹은 여덟 살 때였을 것이다. 나는 하릴없이 마당에 쌓인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마당으로 나와 나는 집 안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지난겨울에 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선물로 받은 노란 털장화도 꺼내 신은 뒤였고, 가장 아끼는 옷도 고집을 부려 꺼내 입은 뒤였다.
나는 연탄재를 주어다가 눈을 붙인 다음 둥글게 굴려서 눈사람의 몸집을 불려나갔다. 눈사람 만들기에 열심인 척했지만 속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같이 마당에서 눈놀이를 하려는 막내 동생을 억지로 떼어놓아 집안에 가둔 것도 다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밤 잠들기 전, 엄마와 아버지가 나누던 이야기를 나는 자는 척하며 모두 들었다.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엄마가 내일 서울에 다녀올 거란 말을 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엄마는 혼자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여탕에도 아무 문제 없이 드나들던 나는 기차도 표 없이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제법 똑똑한 아이였다. 나는 텔레비전에서만 보았던 서울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혹 늦잠이라도 자서 엄마 혼자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을까 봐 조바심 내며 간신히 지난밤을 보낸 터였다.
이른 아침 외할머니가 집에 오셨다. 물론 나를 포함한 동생들을 돌봐주기 위해서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 아이들에 포함되는 것을 일찍이 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마당에 나가 엄마를 기다렸다. 순순히 엄마가 내 손을 붙잡고 서울에 데려가 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꼭 서울이 아니라 해도 뭐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니 내게도 일종의 방법이 있었다. 무작정 떼쓰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간혹 엄마가 울며 떼쓰는 나를 한두 대 쥐어박겠지만 감내할 만한 일이었다. 꿈에 그리던 서울이 아니던가. 두어 발짝 떨어져서 떼를 쓰면 창피해서라도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내 손을 잡아끌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어린 나로서는 이미 서울행이 결정이 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기다렸던 시간이 오고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어머, 얘가 여깄었네.” 나는 엄마가 나오자 달려가 대문을 열고 밖에 섰다. “나도 같이 갈 거야.” 뒤따라 나온 외할머니가 나를 잡으러 왔지만 나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 그래도 허전한 터였는데, 큰 애는 데리고 갔다 와야 쓰겄네요.” 예상했던 것하곤 다르게 너무 순순히 엄마는 서울여행에 나를 끼워주었다. 그러나 추우니까 옷을 더 입자는 말에도 나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끝내 고집을 부려 옷을 밖으로 가지고 나오게 해서 입고는 서울 갈 채비를 마쳤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기차를 타 본 것도 처음이었다. 혹시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엄마의 치맛자락을 놓지 못했다. 처음 본 서울의 모습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거대한 곳이었다. 다른 곳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서울역과 남대문, 그리고 시장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걸 보면 어린 시절 받은 충격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몇 날 동안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서울과 근교에 사는 친척집 여러 곳을 다녔던 것 같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난생처음 보는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며 그곳에 살고 있던 사촌들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그들이 먹는 음식도 내가 먹는 것과는 다르고, 입는 옷도, 사는 곳도 훨씬 좋아 보였다. 어쨌든 나의 처음 서울 여행은 그런 면에서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서울에 사는 것을 꿈으로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엄마는 계획했던 일들이 잘 되지 않는 듯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가 왜 서울에 와야 했는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엄마는 돈을 꾸러 온 것이었는데, 친척 누구도 돈을 마련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급기야 마지막으로 들른 둘째 이모집에서는 서운함을 참지 못하고 이모와 엄마가 다투었다. 엄마는 울면서 내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이제 막 정이 들기 시작한 사촌과 헤어지기 싫어서 나도 울었다. 급히 따라나온 이모가 내 호주머니에 천 원짜리 몇 장을 구겨 넣어주었지만 엄마가 얼른 도로 빼서 돌려주었다.
서울역으로 가는 도중, 기차시간이 많이 남았었던지 엄마는 내 손을 남대문 어딘가로 끌었다. 이 사건은 그 모든 겨울의 어느 날을 기억할 수 있게 된 연유였다. 처음 본 백화점에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분명 신세계 백화점이나 롯데 백화점 근처였을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나는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몰라서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에 같이 씹어야 돼.” 주인아주머니가 다가와서 햄버거를 두고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 엄마와 나를 보며 말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을 훔치며 엄마가 햄버거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반을 쪼개서 엄마에게 건넸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서울맛이었다.
집으로 내려온 뒤로 엄마는 가끔 햄버거를 만들어 주었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햄버거는 서울에서 먹었던 것과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속에 넣은 고기도 한우를 직접 갈아 넣은 것이었고, 토마토도 넣고 싶은 대로 넣었고, 계란 후라이도 두 개나 들어간 햄버거였다. 무엇보다 한입에 넣고 오물거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엄마의 햄버거! 서울 햄버거 저리가라였다. 잘 살던 친척들 저리가라 버거! 엄마 햄버거에서는 서울맛이 나지 않았지만 힘들었던 어느 한겨울 맛이 났다. 지금도 버거킹이나 맥도날드를 씹을 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그 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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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정일의 시집 제목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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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백가흠
소설가. ‘나비’ 편집위원.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광어」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우리 시대의 극단적인 정신세계와 불편한 현실을 아이러니와 판타지로 녹여내는 개성적인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소설집으로 『귀뚜라미가 온다』, 『조대리의 트렁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