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결국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토해내고 말았다. 주위는 어둡고 나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로스앤젤레스 어디쯤인 건 아는데 주위에 집들도, 불빛도 찾아볼 수 없다.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지 오래다. 어깨가 내려앉을 것 같고 손목이 부러질 것 같다. 이런 곳에서 주저앉아 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분명히 이 정류장에 내리면 로스앤젤레스 공항으로 가는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밤이라 잘못 내린 것 같다. 다행히 정류장의 불빛이 보이지만 신기루처럼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캐리어와 가방 안에는 책이 가득 차 있다. 족히 삼십 킬로그램이 되는 짐을 울퉁불퉁한 길 위로 끌고 가다가 결국 작은 돌멩이에 바퀴가 걸려 쓰러져 버린 것이다.
휴우, 한숨을 쉬고 짐가방을 열어본다.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의 지나치게 두꺼운 소설 Infinite Jest가 옷가지 사이로 튀어나온다. 데이빗 리빗(David Leavitt)의 단편집과 A. M. 홈스(A. M. Homes)의 새 장편소설, 뉴욕 지하철의 역사에 관한 책도 보인다. 어떤 책을 버리면 가벼워질까, 가라앉고 있는 열기구에서 무게를 줄이기 위해 무얼 버릴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처럼 책을 훑어본다.
어차피 이 책을 한국으로 가져가봤자 다 읽을 것도 아니잖아? 또, 이미 읽은 책들은 왜 가져가지? 버려, 다 버리라고! 머릿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지만 다시 짐을 싸고 어두운 거리를 걷는다. 이제는 욕도 나오지 않는다. 입에서 단내가 날 뿐이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다시는 책을 사지 않겠다고. 그 결심이 다시는 맥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헛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책을 살 때엔 지금 이 순간을 꼭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터벅터벅 계속 길을 걸었다. 점점 손목과 어깨에 감각이 없어질 때 즈음에서야 셔틀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물론 다시는 책을 사지 않겠다는 그때의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책을 이전보다 많이 사지 않는다. 저자나 편집인들이 주는 책은 어쩔 수 없이 받아오지만 책들이 차곡차곡 책장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문득 겁이 난다. 만약 이사라도 간다면 저것들을 어떻게 옮기지? 사실 옮길 책은 사들인 책보다 만든 책이 더 많다. 문화잡지 <보일라>를 수년간 해오면서 쌓인 과월호부터 시작해, 자비 출판해서 팔리지 않은 소설 수백 권, 한페이지 단편소설에서 만든 책들까지 합하면 이삿짐의 무게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책은 쉽게 버릴 수가 없다. 손목과 어깨의 고통, 나의 몸은 그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작년에 아마존 닷컴에서 킨들(Kindle) 전자책 뷰어가 나왔을 때에 쾌재를 불렀다. 마침내 책의 무게와 부피가 줄어들 희망이 보이는 건가? 근래에는 킨들 판매도 순조롭고(새 버전이 출시되었다) 슬슬 우리나라에도 자체개발한 전자책 리더가 나오고 있는 걸 보니 이번 시도는 해프닝에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책만큼 읽기가 편하지 않더라도 가볍고 수백 권의 책을 담을 수 있다면, 적당한 가격에 무선 네트워크 기능을 갖고 있다면, 문서파일과 PDF 파일, MP3 파일을 읽을 수 있다면, 그리고 장기적으로 콘텐츠를 제공할 계획을 갖고 있다면(정말 요구 사항이 많지만) 나는 종이책을 가차없이 버릴 것이다. 더 이상 여행 가방에 책을 담지 않고 책장에도 책을 꽂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손으로 넘겨볼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책을 사랑한다. 책은 그 자체로써 기기와 콘텐츠의 역할을 함께 할 수 있는 완전한 문화상품이다. (배터리나 플레이어가 필요 없다. 극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 오래가고 휴대하기 쉬우며 책꽂이에 꽂아 놓으면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래서 아직도 두 번 다시 읽지도 않을 책들을 집안에 가득 채워 놓고 있다. 다시는 책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꾸역꾸역 책은 늘어만 간다. 언젠가는 헤어질 오래된 연인처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어느 순간 종이책에 대한 사랑은 급격하게 식을지 모르지만, 사랑이 끝나기 전까지는 도저히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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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서진
소설가. ‘나비’ 편집위원. 전자공학 박사과정을 중퇴하고 캘리포니아에서 유랑하던 중 돌연 소설을 쓰리라 결심한다. 2004년 첫 장편소설 『채리』를 자체 제작하여 온라인 판매를 했으나 400여 권이 남아 집에 차곡차곡 쌓아놓았고, 2005년 연작소설 『하트모텔』을 자체 출판하였으나 제목만 야하다는 주위의 원성을 듣고 『채리』와 함께 보관 중이다. 더 이상 책을 쌓아둘 장소를 찾지 못하던 중, 2006년 뉴욕에서 쓴 세 번째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를 문학상에 처음으로 투고, 제12회 한겨레문학상을 받는다. 인디 문화잡지 <보일라>(VoiLa)의 편집장을 지내며 30여 호의 잡지를 기획하였고, 2004년부터 지금까지 대안출판 프로젝트 ‘한페이지 단편소설’을 운영하면서 끊임없이 책을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