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일 행정안전부가 지방자치단체 외국인주민 현황을 발표했다. 해마다 한 번씩 하는데 기준은 2016년 11월 1일이다. 여기에서 김해는 외국인주민이 2만5957명이었다. 남자는 1만8088명이고 여자는 7869명이다. 김해 전체 인구 53만 2912명의 4.9%에 해당한다. 김해가 외국인주민이 경남에서 가장 많다. 두 번째인 창원은 2만4881명2.4%이고 세 번째인 거제는 1만4340명5.5%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김해는 경기도 안산시7만9757명와 서울 영등포구5만5427명 등등에 이어 열네 번째로 많다.
김해 외국인주민 가운데 1만3599명이 외국인 노동자창원 8990명, 거제 6364명다. 결혼이민자는 1642명, 유학생은 352명, 외국국적동포 2337명이고 기타노동자 4497명, 한국국적 취득자 1372명, 외국인주민자녀 2158명이다. 김해에서 외국인노동자가 1000명 넘는 지역은 한림면2564명, 진영읍2088명, 주촌면1927명, 진례면1738명, 상동면1058명 다섯이다.
이들 지역에는 중소·영세 규모 공장들이 특히 밀집해 있다. 중소·영세 규모 공장들은 대규모 공장들보다 외국인노동자들이 더 필요하다. 작은 공장에는 대체로 한국 사람들이 더럽고 어렵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꺼리는 작업이 많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런 데서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작업을 한다. 그런데도 또는 그렇기 때문에 받는 월급은 잘해봐야 법정 최저임금 수준에 머무르고 어떤 경우는 더 내려간다.
김해는 변방이다. 공장은 허름했고 하는 일은 고달팠다. 1차 하청은커녕 재하청 또는 재재하청 협력공장으로 먹이사슬의 밑바닥에 놓여 있다. 높은 부가가치는 기대를 하는 자체가 사치이고 현상 유지만 해도 감지덕지다. 김해에 들어선 공장이 대체로 그렇다. 이런 김해의 공장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외국인노동자가 몰려들었다. 외국인노동자들의 고국 또한 대체로 변방이다. 변방이라서 변방을 불러들였다. 변방은 변방이 알아보는 법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하나. 외국인노동자는 잠재적 범죄자일까, 아닐까? 외국인노동자라 해서 유별나게 착하지도 않지만 유별나게 나쁘지도 않다. 외국인이 없었던 옛날에는 당연히 외국인 범죄도 없었다. 지금 외국인 범죄는 한국에 외국인이 들어와 있기에 당연히 생기는 것이다. 그이들 범죄율은 한국 사람보다 크게 낮다. 경찰청 자료를 보면 2016년 범죄율이 한국인은 3.9%인 반면 외국인은 2.1%에 머물렀다. 형사정책연구원이 분석한 2011~2015년 10만 명당 범죄발생률도 한국인이 외국인보다 높았다. 심지어 외국인이 가장 높았던 2011년에도 10만 명당 검거인원지수는 한국인이 3524명으로 외국인의 1591명보다 2.2배 높았다. 2012~2015년 검거인원지수는 한국인이 외국인보다 당연히 2배 넘게 높았다.
그런데도 외국인노동자는 우리한테 위험한 존재로 여겨진다. 2017년 11월 24일치 경향신문 보도는 이렇다. “지난해 IOM이민정책연구원이 ‘외국인노동자가 늘어나면 범죄율도 올라간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사람 46.7%가 ‘그렇다’고 답했다.” 외국인노동자는 이미 우리 풍경 속에 들어와 있다. 외국인노동자뿐 아니라 결혼이주민과 외국인유학생, 외국국적동포가 모두 익숙한 이웃이 되어 있다. 색안경을 벗어던질 때가 되었다. 편견과 오해는 그릇된 차별과 배제를 불러일으킨다.
외국인주민이 3만 가까이 되다 보니 김해에는 외국인거리가 있다. 옛 도심인 동상동·서상동 일대다. 옷가게·휴대폰판매점·환전소 따위 가게 간판은 여러 나라 문자로 표기되어 있고 노래방에 가면 노래 목록이 나라별로 따로 있을 정도다. 베트남 쌀국수 가게를 비롯해 인도네시아·중국·태국·몽골·베트남·캄보디아 등 아시아 여러 나라 전문 음식점들도 수십 군데 있으며 아시아마트도 여럿이다. 올해 들어서는 주말마다 외국인노동자가 하루 3000명가량 찾는다고 한다. 한 해 전인 2017년보다 1000명 정도 늘어났다.
여기에 외국인거리가 들어선 원인은 동상시장에 있지 싶다. 조선 말기부터 2일·7일에 열렸던 읍내장에서 비롯되었다. 구색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데다 가격까지 싼 편이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국수거리칼국수타운는 그 자체로 명물이다. 주머니 가벼운 외국인노동자들이 자연스레 모여들게 된 원인이다. 여기에 입소문이 더해지면서 가까운 창원·부산에서 일하는 외국인노동자들까지 걸음을 하고 있다.
1990년대 아케이드 사업을 벌여 언제든지 눈비 맞지 않고 일을 볼 수 있게 되었고 2000년대에는 조명을 밝게 바꾸어 어둡고 칙칙한 이미지를 털어냈다. 2017년에는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예산으로 다문화 홍보관과 쉼터를 꾸몄다. 홍보관은 외국인노동자나 결혼이주민으로 와 있는 이들의 조국이 어떤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는지 일러준다. 쉼터는 말 그대로 탁자와 의자, 텔레비전과 정수기 등을 갖췄다. 시장이나 가게에서 튀김·족발·떡·김밥 또는 출신 나라 전통음식을 장만해 와서 함께 먹고 마시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여러 나라 전통의상을 갖춘 포토존은 덤이다.
외국인거리 서쪽에 있는 수로왕릉·왕릉공원·수릉원도 외국인노동자들의 발길이 잦다. 수로왕릉의 주인은 가락국 초대 임금 김수로왕이다. 이미 2000년 전에 멀리 인도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황옥과 국제결혼을 한 인물이다. 색다른 외국인거리와 토속적인 한국전통시장, 그리고 독특한 사연을 품은 문화재가 한 데 어울리는 드문 자리다. 이렇게 바탕이 다른 것들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는 데가 바로 변방이다.
김해는 창원과 부산에서 사람도 받아들여야 했다. 김해 옛 시가지는 원래 좁기도 했거니와 대부분 문화재보호지역이라 개발이 어려웠다. 옛 시가지와 김해시청 서쪽에는 해반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해반천 서쪽 내외동이 지금은 높다란 아파트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원래는 대부분이 습지였다. 1990년대 아파트용 택지로 58만 평이 조성되기 전에는 미나리꽝이 전부였다. 내외동 가까이 연지공원 옆 구산개발지구는 2006년부터 6000세대 목표로 경남개발공사가 조성했는데 2012년 즈음에 계획대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동김해 지역은 내외동과 거의 같은 시기에 조금 앞서 개발되었다. 김해 남산에서 동쪽으로 삼정동·활천동에서 시작해 어방동~삼안동~지내동으로 이어진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면서 김해에서 가장 먼저 신도시로 탈바꿈했다. 우신그린피아 1997년 325세대, 어방시영 1992년 318세대, 어방화인 1996년 727세대, 대우유토피아 1994년 2041세대 아파트 등이 그 일부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장유면이다. 1990년대 장유신도시 개발과 2000년대 율하신도시 개발을 통해 2012년 8월 현재 인구 13만406명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가 되었다. 면 단위로는 전국 최다 인구였다. 2017년 경남 군 단위 인구 최다가 함안군 6만8580명이다. 장유면은 이미 5년 전에 이보다 6만 명이 더 많았고 11만~12만 수준인 밀양시·사천시 전체 인구보다 많았다. 장유면은 2013년 7월 장유1·2·3동 셋으로 쪼개지면서 동 지역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대규모 아파트 개발은 대규모 문화재 발굴로 이어졌다. 1970년대 개발독재 시절이었으면 그냥 그대로 싹 밀어버릴 수 있었지만 1990년대에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일정 규모 이상 개발은 반드시 문화재 발굴 조사를 하도록 바뀌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김해 곳곳에서 땅 속에 묻혀 있던 문화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김해 지역에서는 산비탈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왜 계통 토기가 숱하게 출토되었다. 수로왕 등장 이전인 2500년 전에 이미 김해가 일본과 교류하고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구산지구에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무게가 350톤 이상으로 지금으로서는 덮개돌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12년 구산동지석묘라 이름을 붙이고 경상남도기념물 제280호로 지정해서 도로 묻어 버린 다음 표지판을 세웠다. 연지공원 근처 연지2교 사거리와 이진캐스빌1단지아파트 사이 녹지에 해당된다.
장유면은 개발도 대규모였고 발굴도 대규모였다. 먼저 1500년 전 항구 유적으로 선착장과 건물터, 도로 자리가 발굴되었다. 지금 관동유적공원으로 남았는데 선착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두 번째로 크고작은 다양한 고인돌도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 공동묘지라 할 수 있는 일대에는 지금 율하유적공원(A)과 유적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370m가량 떨어진 데율하동 1350-2에서는 솟대 유적도 나왔다. 솟대 유적 발굴은 우리나라에서 여기가 유일하다. 옛날 신성불가침 영역을 나타내는 표지인데 죽은 이들을 위한 무덤 영역과 산 사람들을 위한 주거지를 가르는 표식으로 여겨진다. 아파트 사이에 옹졸하게 남았는데 율하유적공원(B)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 번째로 관동고분공원도 유적이 발굴된 자리다. 2000년 전 우물과 고상가옥터, 공공건물터 등이 나왔다. 이들은 모두 장유3동 구역에 들어 있다.
부산과 창원에서 사람들을 받아들이려면 김해는 대규모로 아파트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아파트를 짓지 않았으면 계속 땅 속에 묻혀 있었을 문화재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지금 김해가 변방이 아니었다면 김해는 지금처럼 풍성한 고대사의 물증들을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2009년 5월 23일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다. 그이는 그야말로 변방의 정치인이었다. 먼저 고등학교까지만 마치고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1988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된 뒤에도 변방을 돌았다. 1990년 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통일민주당의 3당합당 국면에서는 야합이라고 비판하며 동참을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으로 남았다. 그 뒤로도 노무현은 정치의 변방이던 부산에서 줄창 떨어지는 선거를 했다. 1996년 딱 한 번 서울 종로에 나가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으나 3위로 떨어졌으며 4년 뒤에는 당선이 유력하다는 서울 종로를 버리고 부산으로 와 선거에 나서 또 떨어졌다.
2008년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서도 노무현의 선택은 변방이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4월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은 미국 하와이로 달아났고 독재자 박정희는 대통령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윤보선과 최규하는 물론 전두환과 노태우를 지나 김영삼과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17대 대통령 이명박과 18대 대통령 박근혜도 마찬가지다. 자택에 있느냐 아니면 감옥에 있느냐 정도가 다를 뿐이다.
노무현은 고향에서 고향 사람들과 어울렸다. 봉화산과 화포천과 봉하들녘과 같은 고향산천을 고향 사람들과 더불어 가꾸고 돌보았다. 덕분에 고향이 아름다워지고 깨끗해졌다. 그런 영향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환경부는 화포천을 지난해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했고 올해는 생태관광지역도 겸하도록 했다. 봉하들녘에서는 노무현이 시도했던 친환경농법이 여태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은 지금 봉하마을에 조성된 묘역의 너럭바위 아래에서 영면하고 있다. 너럭바위는 고인돌을 닮았지만 고인돌처럼 무겁지는 않다. 여기 너럭바위는 두드러져 보이지도 않으며 어깨에 힘을 넣고 위세를 떨치는 품새도 아니다.
이북면이 한림면으로 바뀐 것도 김해가 변방이기 때문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한림면사무소 홈페이지를 보면 한림면이 한림면이 된 과정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부터 하북면으로 명명되어 왔었다. 이후 조선 말기 1896년에 상북면上北面과 하북면下北面으로 분리되었다. 1914년 다시 병합되면서 이북면二北面이 되었다. 이북면은 북쪽에 위치한 두 개의 면이 합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북’이란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하여 1987년에 한림면翰林面으로 개칭하였다. ‘한림’이란 명칭은 중심 마을인 한림정에서 따왔다.” 조선시대 지리책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방면’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중북中北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다. 하북下北 :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다.” 한림면사무소 홈페이지의 상북·하북이 중북·하북으로 다를 뿐 북이 두 개인 것은 마찬가지다.
이북면이 족보도 없는 한림면으로 바뀐 까닭이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하여’란다. 왜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했을까? 사실 발음은 자연스러웠으나 듣기가 거북해서 바뀌었다. 옛날에는 북한을 이북이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북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북 사람이 되었다. 상대방이 혹시 기분이 나빠지면 ‘이북 자식들’ 또는 ‘이북 새끼들’이라고도 했겠지.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다 보니 북쪽은 일단 적대시하고 경멸하는 풍조가 퍼져 있는 상황에서는 견딜 수 없는 노릇일 수도 있다. 남북대결과 상대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이 불러온 결과라고나 할까. 휴전선에서 340~350km 떨어진 남쪽 고장 작은 변방에서 3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지금 이북면의 자취가 남아 있는 데는 하나뿐이지 싶다. 이름이 바뀐 1987년에 열 살 스무 살이던 이들은 애써 이북면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보다 젊은 축은 한림면이 예전에는 이북면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다만 이북초등학교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 이북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열었다. 올해 2월 배출된 88회 졸업생은 여학생 5명과 남학생 8명 등 모두 13명이다. 이북초등학교 졸업생과 재학생은 그 이북이 왜 이북인지 혹시 알고 있을까.
★ 이 글은 『두 도시 이야기:기억의 서사적 아카이브전』에 김해 소개글로 실린 글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