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게는 ‘땅’이 있다. 시의 원적지이자 시인의 근거지로서의 땅. 예컨대 백석 시의 활동 무대는 평안북도와 만주 일대다. 시와 장소, 시인과 지역의 연관은 거의 숙명에 가깝다. 미당의 질마재, 용악의 ‘두고 온 북쪽’, 신동엽의 금강은 물론이려니와 김준태의 무등산, 이상국의 동해바다, 최승호의 탄광촌, 김용택의 섬진강…. 한국 현대시의 명편 대부분을 대한민국 전도 위에 배치할 수 있다.
지리산을 시적 재산권으로 등재한 시인들도 있다. 20년 전 지리산에 깃든 이원규 시인이 그중 하나다. 이 시인의 ‘땅’에 대한 애착은 도를 넘어선다. 그의 족적을 돌아보면 한반도 남쪽이 다 자기 영토다. 낙동강 줄기를 두 번, 지리산 둘레를 세 번 돌았다. 4대강 줄기를 다 걸었고 1년간 탁발순례를 하며 남도 땅을 밟았다. 그뿐 아니다.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 지리산에서 임진각까지 오체투지를 했다. 가히 ‘걷기의 제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걷는 시인은 라이더이기도 하다. 두 발로 걷는 사이사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이 땅을 누빈다. 2010년 일간지에 연재를 할 때에는 6개월 반 동안 서울과 제주를 제외한 전국의 길을 달렸다. 총 주행거리 2만5000㎞. 지구 반 바퀴를 돈 셈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뒤엔 여러 직함이 붙는다. 도보순례자, 라이더, 활동가, 유발승有髮僧, 대학강사. 최근 하나 더 생겼다. 야생화 사진가.
지난 9월 중순, 이원규 시인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10여년 만에 ‘출장’을 다녀온 것이다. 사연인즉슨, 내가 전에 몸담았던 시사주간지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현장을 떠난 ‘예비역’들에게 지면을 내줬다. 나는 ‘지리산 850리 도보순례’ 후일담을 쓰기로 했다. 2001년 5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7대 종단이 모여 ‘지리산 위령제’를 지냈다. 15일간 진행된 도보순례는 위령제의 일환이었다. 수경 스님과 이원규 시인이 순례단을 이끌었고 나는 취재기자로 따라나섰다. 지리산 기슭을 밟으며 6·25 전후 좌우 대립으로 스러져간 넋을 기리고 ‘생명 평화’를 염원했다.
그 후 서너 번 지리산을 다녀왔지만, 이원규 시인의 근황은 그때마다 풍편으로 전해 들었다. 몇년 전, 그가 카메라를 메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오토바이에서 카메라로? 하지만 도보순례자와 라이더 사이처럼 멀어 보이진 않았다. 시와 사진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중 하나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내는 능력이다. 여기에 집중력과 인내심이 보태져야 한다.
이 시인과 지리산 둘레길을 둘러본 뒤 섬진강 건너 광양, 그의 집으로 향했다. 일곱 번 이사한 끝에 지난해 마련한 시인의 집은 작은 갤러리를 겸하고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지리산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에 이어 사진으로 옮아갔다. 탁발순례 후유증이 그에게 카메라를 안겨줬다고 한다. 2009년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1년간 치료를 받으면서 야생화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독학이었다. 사용설명서를 백 번 넘게 읽었고 하루에 만 컷 이상을 찍어댔다.
3년쯤 지나자 ‘감’이 잡혔다. 하지만 야생화 사진의 진입장벽은 높았다. 고수들이 수두룩했다. ‘이원규만의 사진’이 필요했다. 발상을 전환했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면 사진가들은 산에서 내려온다. 나는 그때 산으로 올라갔다.” 안개 속에 피는 꽃을 찍는 일은 야영의 연속이었다. 혹독한 기다림의 나날이었다. 2015년 첫 개인전을 열었고 그의 ‘몽유운무화’를 찾는 이들이 생겨났다.
3년 전, 그의 역발상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어둠을 찍기로 한 것이다. 그는 요즘 밤하늘의 별과 지상의 나무가 한 프레임에 들어가는 ‘별나무’ 시리즈에 집중하고 있다. 야생화보다 훨씬 까다롭다. 반경 40㎞ 이내에 도시가 없어야 한다. 달이 뜨거나 날이 흐리면 1년을 또 기다려야 한다. 한 나무를 3년 이상 지켜봐야 겨우 한 컷이 나온다. 그는 ‘별나무’를 발견하고 희귀 야생화에 등을 돌렸다. 그의 사진이 자연을 파괴하는 데 일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희귀 꽃 사진은 그 위치가 알려지기 마련이다. 한 번 알려지면 훼손된다. 촬영하고 나서 다른 사람이 찍지 못하게 꽃을 죽여버리는 이들도 있다.
이 시인은 ‘천생 사진가’가 될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전국을 걸으며 장소 헌팅을 해놓은 데다,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기동력이 있다. 게다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50대에 접어들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그가 한층 미더워 보였다. 어둠을 찍는 사진가와 헤어지면서 ‘시는 밥이 안되지만 사진은 밥이 되니까 참 다행’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대신 앞으로 나올 그의 시와 글, 사진이 우리에게 축복일 것이라고 말했다. 모처럼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가뿐했다.
★ 본 기고글은 경향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