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내가 속한 문단 송년회가 12월20일께 열려서 대선이 있는 해에는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다. 14년 전에는 잔칫집 같았고 9년 전과 4년 전엔 초상집 같았다.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던 2012년에는 말 그대로 ‘망년회’였다. 한 친구는 술을 끊겠다고 했다. 선배는 담배를 끊어버리겠다고 했다. 평론하는 후배는 아예 나라를 떠나겠다고 했다. 새벽녘에 귀가하던 친구들의 뒷모습이 그렇게 을씨년스러울 수가 없었다. 내게 그해 연말연시는 음산했다.
네 번째 겨울이 다가온다. 대선 직후, 그것도 울분을 토하는 술자리에서 남발됐던 문우들의 ‘공약’을 누가 기억하랴. 여전히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늘 그랬듯이 이민 간 친구는 없었다. 다들 꾸역꾸역 글을 쓰고 책을 냈다. 그런데 얼마 전 독한 친구들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강화에 사는 시인은 여전히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술자리라면 새벽에도 달려오던 친구였는데 지난 4년간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했다. 전주에 사는 시인은 아예 붓을 꺾었다. 정권이 바뀔 때까지 글을 발표하지 않겠다는 절필선언을 지금도 지키고 있다.
담배 생각이 날 때마다 대통령 얼굴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깨문다는 친구도 있다. 이쯤 되면 분노가 아니라 저항이다. 장기 지속 저항. 나는 시 쓰는 친구들의 단호한 각오와 결기가 부럽다 못해 존경스럽다. 어디 내 친구들뿐이랴.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위대한 반골의 목록은 금세 길어진다. 월든 호수에서 자율과 자립을 실험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 물레를 돌리며 인도의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고자 했던 간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톨스토이, 뉴욕 한복판에서 ‘1인 혁명’을 도모한 애먼 헤나시.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일이 영 손에 잡히지 않는다. 펜을 잡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책을 펼치기조차 어렵다. 일상의 리듬이 다 깨져 버렸다. 수시로 스마트폰을 열어 뉴스를 클릭하는 게 난데없는 일상이 됐다. 중독도 이런 중독이 없다. 뉴스 중독, 미디어 중독. 연일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고 뉴스가 드라마를 압도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 2항이 아마존 원주민 언어처럼 낯설다. 무엇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청년들과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다.
돌아보면 연례행사다. 최근에만 해도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한 대형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세월호, 메르스, 가습기 살균제, 사드, 백남기. 초대형 이슈가 한 철이 멀다하고 터지는데도 매번 처음 겪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참담하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는 미래라는 말이 있다. 매듭짓지 않은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과거는 반드시 미래로 간다. 가서, 당사자 모르게 당사자를 기다린다. 당사자가 앞만 보고 걸어갈 때, 어느 날 불쑥 과거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급정지시킬 때가 있다.
세월호가 그렇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다. 세월호에 대한 애도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해원解寃이 이뤄졌다면 오늘과 같은 파천황의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적 해원이란 무엇인가. 오직 하나다. 진실을 밝히는 것. 진실이 ‘인양’되지 않는 한 세월호에 대한 애도는 계속 유예된다. 나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집단적 공황 상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세월호라고 생각한다. 치유되지 못한 사회적 트라우마가 성난 여론의 밑바탕에 누적되어 있다. 그래서 이번 촛불은 이전과 성격이 다르다.
분노는 쉽게 잦아들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분노의 크기나 강도가 아니다. 분노 그 다음이다. 분노가 저항으로 이어지고, 저항이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돼야 한다. 분노가 단순한 화풀이에 그친다면 청와대와 국회를 또 다른 세월호, 즉 청산하지 못한 과거로 만드는 것이다. 분노가 앞에서 예로 든 시인들처럼 장기적 저항으로 전환돼야 한다. 그런 저항들이 모여 사회적 담론으로 확대돼야 한다. 분노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집단지성의 불씨가 돼야 한다. 분노한 국민이 먼저 꿈꿔야 한다. 저항하는 국민이 먼저 미래를 살아야 한다.
“분노한 다음날이 더 중요하다.” 지난 7월 슬라보예 지젝이 남긴 메시지다. 지젝은 경희대와 플라톤아카데미가 공동 기획한 ‘문명전환’ 특강에서 분노가 왜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는가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다. 지젝은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대중들이 기존질서에 타협한 탓에 분노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그렇다. 촛불을 켜기 전에 그 다음날을 상상해야 한다. 지금과 다른 미래를 우리 스스로 설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도 촛불의 다음을 저 ‘눈먼’ 정치인들, 파렴치한 기업인들이 강탈해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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