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우리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주소서.’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1892~1971의 기도문 첫머리다. 6년 전, 서울 평창동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러 갔다가 마주쳤다. 1층 출입문 왼쪽, 붉게 녹슨 철판에 단정한 명조체로 새겨져 있었다. 3행으로 이뤄진 기도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우리가 바꾸어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무엇보다 저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소서.’
바로 수첩에다 적었다. 그리고 자주 중얼거렸다(여러 번 중얼거리는 동안 번역문이 조금 고쳐졌다). 돌아보면 아련하고 내다보면 아득할 때, 전후좌우가 희미해져 방향 감각을 잃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저 기도문을 앞에 놓고 들숨과 날숨을 가지런히 했다. 스스로 캐물었다. 이것은 바꿀 수 있는 것인가, 바꿀 수 없는 것인가. 혹시 내가 둘을 혼동하는 것은 아닌가. 나의 용기는 지혜에 바탕을 둔 것인가. 그러다 보면 내가 지금, 여기로 돌아오곤 했다.
말에는 힘이 있다. 아니, 힘이 있는 말이 있다. 평소 무심하게 지나쳤던 한마디 말이 삶의 정수리를 내려칠 때가 있다. 내게는 니부어의 기도문이 그런 말 중 하나다. 그래서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저 기도문을 받아 적게 한다. 어쩌다 주례를 서게 될 때도 즐겨 인용한다. 하지만 스무 살 청년이나 신랑·신부에게 저 메시지가 쉽게 각인되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 용기라면 몰라도 지혜, 특히 평온은 매우 낯선 덕목일 것이다. 그럼에도 저 기도문을 ‘강요’하는 까닭은 생의 어느 고단한 날에 불현듯 저 메시지가 떠올라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시민대학 글쓰기 교실은 조금 다르다. 중년층이 대부분인 시민대학 수강생들은 저 기도문을 받아 적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 세 문장으로 자기 생애의 앞뒤를 정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면에서 두어 차례 소개했지만 시민대학 글쓰기는 자기 삶을 성찰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지나온 삶, 즉 ‘바꿀 수 없는 것’을 이야기로 재구성하다 보면 거기에서 관계를 재발견하고 새 의미를 부여한다. 이때 평온이 찾아온다. 자기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처음에는 과거를 돌아보는 글쓰기를 버거워한다. 지난날 어딘가에 깊숙이 박혀 있는 상처와 대면하기가 힘든 것이다.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주제로 두세 편 글을 써내려가다 보면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낯빛이 밝아진다. 자신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마지막 10주차 주제 ‘내가 살고 싶은 집, 내가 살고 싶은 마을’을 받아들면 한숨을 내쉰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보다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자기 미래를 구체적으로 디자인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7년째 글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매번 확인한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는다.’ 글쓰기를 배우겠다고 자청한 시민들의 경험과 희망을 일반화한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이 험악한 사회에서 ‘한가하게’ 글을 쓰겠다는 시민들을 평균 시민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억지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읽은 500편 가까운 글, 그러니까 연령, 직업, 가치관이 다 다른 500명의 시민이 획일적으로 미래를 상상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살고 싶은 집, 살고 싶은 마을을 주제로 한 글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로망’이 있다. 99퍼센트가 도시를 거부한다. 99퍼센트의 글에 ‘하늘이 보이는 넓은 유리창’이 나온다. 같은 비율로 텃밭 가꾸기가 등장하고 또 같은 비율로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꿈꾼다. 세계 여행과 봉사하는 삶이 여생의 핵심이다. 아파트에 살겠다는 글은 1퍼센트도 안된다. 30퍼센트 정도가 한옥에 살고 싶어 한다. 나머지는 지하실이 있는 2층 양옥을 선호한다. 집에는 혼자 쓸 수 있는 방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친척이나 이웃, 손님과 함께하는 거실 또한 필수다. 나무를 심은 마당에는 닭이나 강아지가 돌아다닌다.
살아온 날들은 저마다 다른 데 살아갈 날들은 거의 똑같다. 이 같은 결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다. 시민들의 에세이에 나타난 ‘하나의 미래’를 자기 삶을 돌아볼 겨를조차 없는 도시적 삶에 대한 정당한 반감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과거 돌아보기가 그랬듯이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봐야 하는가. 내 해석이 편협할 수도 있다. 시민들의 ‘하나의 로망’을 강력한 요구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꾸어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곳곳에서 표출돼야 한다. 니부어의 용기와 지혜를 아우르며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이 절실한 때다.
★ 본 기고글은 경향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