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둘러싼 스위스의 국민투표 결과가 압도적 부결 쪽으로 나왔다. 이 결과에 대해 한국의 언론매체들도 큰 관심을 가지고 여러가지 논평·해설기사들을 내놓고 있다. 문제의 중요성에 비추어 당연한 현상이지만, 그중 웃기는 것은 일부 수구 (사이비)언론과 정치인들이 드러내는 반응이다. 그들은 “거봐, 그런 좌파적 발상은 애당초 말이 안 되는 거었여”라며 또다시 상투적인 ‘좌파 타령’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데 이 국민투표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진지한 기사를 쓴 소수의 몇몇 ‘진보’ 언론들도 웬일인지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이번에 스위스에서 제안된 기본소득 금액 월 2500프랑(성인의 경우)은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300만원이라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상식으로는 상당한 고액이지만, 스위스의 물가를 고려하면 근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이다. 그러므로 언론은 이 금액이 실질적으로는 한국 돈 100만원에도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알려줬어야 했다. (몇몇 서양언론은 자기 나라 돈으로 얼마에 해당된다고 구체적인 금액을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스위스가 세계 최대의 고물가 국가라는 사실은 언급했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기본소득의 액수는 이 제도를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설계할지를 정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현지의 물가를 감안함이 없이 그냥 월 300만원이라고 말해버리면, 그것을 듣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부러워하기에 앞서 대체 스위스라는 나라가 얼마나 부유한지 몰라도 저것은 터무니없이 유토피아적인 몽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토록 비현실적인 아이디어라면 어째서 간단히 쓰레기통에 버려지지 않고, 멀쩡한 시민들 10만명 이상이 발의를 하고 근 2년 동안 스위스라는 문명국가에서 거국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을까?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실제로 기본소득 금액의 책정은 굉장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매달 300만원을 전 시민들에게 자산의 정도, 취업 여부, 노동을 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묻지 않고 무조건 일률적으로 지급한다면, (오늘날 생계 때문에 열악한 노동조건을 반강제적으로 감수하고 있는) 한국의 대다수 노동자는 하루아침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기본소득을 시행하면 일은 누가 하나?”라는 질문은 완전히 정당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이라면,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 노동자들이 ‘일’을 그만두는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스위스 국민투표의 실상은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보도에 따르면 반대표를 던진 사람들이 우려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노동인력의 현저한 감소가 초래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스위스의 생산력이 저하될 것이다, 둘째 몇년 이상 스위스에 거주한 사람 전원에게 기본소득 수급 자격이 주어진다면 국외로부터 이주자가 물밀 듯이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기본소득 때문에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는 완전히 비합리적인 편견에 근거한 것이다. 몇몇 사회조사에 의하면, 그런 우려는 대체로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문화권 속에서 특히 심하다고 한다. 기본소득을 받더라도 나는 계속 일을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저 놀고먹을 것 같다는 (지금 거의 모든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이 된) 지독한 타인 불신 사회 말이다.
외국으로부터 이민자가 쇄도해 들어올지 모른다는 스위스 사람들의 걱정은 현재 무슬림 난민문제로 유럽 전체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문제 때문에 기본소득을 제창하는 지식인·활동가들은 궁극적으로 전 세계인 모두가 혜택을 받는 ‘글로벌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스위스의 기본소득 운동가들도 기본소득이라는 프로젝트가 점진적으로 신중하게 이뤄져야 할 새로운 사회실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굳이 국민투표를 선택한 것은 거국적인 열띤 토론과 논쟁을 통해서 스위스는 물론 온 세계가 여기에 주목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투표결과 23% 정도의 지지를 얻고도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의 여론조사 추이를 보면 기본소득에 관한 지식이 보다 깊어질수록 사람들이 이것을 더 강력히 지지하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스위스에서 국가적으로 기본소득이 시행되는 것은 결국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다.
스위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빈부격차,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갈수록 줄어드는 일자리, 경제성장의 종언을 알리는 온갖 징후들과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사회적, 환경적, 실존적 상황에서 지금 세계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표가 아쉬운 정치가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약속들을 끊임없이 내놓지만, 그게 헛소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기후변화 시대에 화석연료를 더 이상 남용해서도 안 되지만, 이제 더는 흥청망청 쓸 석유, 자원들도 남아있지 않다. 과도한 불평등과 실업문제, 만성적인 구매력 부족사태가 해소되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사회적 약자들과 자연에 대하여 점점 더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다가 조만간 자멸할 것이 분명하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기본소득은 현재까지 나온 방안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라는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10년 전쯤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이 아이디어가 이토록 급속히 확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기본소득이 실현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일찍이 미국 클린턴 정부의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로버트 라이시, 혹은 그리스 시리자 정부의 전 재무장관 야니스 바루파키스 등은 최근까지도 기본소득과는 무관한 경제학자들이었다. 그런 그들도 지금은 ‘자본주의의 안정화와 인간화’를 위해서도 기본소득의 신속한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이것 말고는 출구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 본 기고글은 경향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