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할매들이 쓴 시집 『시가 뭐고?』를 읽으셨는지요. 혹 읽지 않으셨다면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시가 왜 마음이고 삶인지 절로 알게 해주는 시들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칠곡 할매들을 통해 제 시의 마음을 들여다봤는데요, 부끄러움만 짙게 깔려 있더군요. 제 시에 제가 먼저 부끄럽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걸 할매들 시를 보며 깨닫습니다.
박후금 할매는, 〈배아아지〉라는 시에서 이렇게 씁니다. “배우깨 조은데/ 생가키거를 안는다/ 글이 안 새가킨다/ 그래사 어렵고/ 힘든다/ 그래도 배아아지” 언뜻 보면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오랫동안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평생의 염원과 안타까움이 틀린 글자와 틀린 문법에 아프게 박혀 있습니다. 시를 적어가는 할매의 떨리는 손길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그 서투른 시심이 아릿하게 제 마음을 적십니다. 이 시를 가만히 읊조려 보십시오. 할매의 입말소리 조근조근 들리시나요. 할매는 부끄러워하시지만, 저는 따뜻하고 흐뭇해집니다. “그래도 배아아지”에서는 설금 마음지립니다.
김복덕 할매의 〈우리 영감〉은 애틋한 사부곡입니다. “영감 떠난 지 벌서 10년/ 일만 하고 보내고 나니/ 너무나 서운하고 가슴이 앞으네/ 어떳개 살아락고 앞에 간나/ 영감은 나한태 마니 해주고 갓는데/ 나는 해준 개 엄네/ 이 다음에 만나면 잘해주개요/ 내가 갈 때까지 잘 있으요/ 당신이 너무너무 보고 싶으요” 나이 든 이들의 사랑은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보다 깊은 사랑 요즈음 볼 수 있을까요. 10년이 지났는데도 할매의 할배 사랑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사람이 들어 있는 글, 삶이 뻐근한 시가 얼마나 든든한지 할매들 시에서 저는 뚜렷이 느낍니다. 잘 쓰고 못 쓰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말과 글의 표준이란 잣대도 별 의미 없을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감동은 이런 데에 있지 않고 사람의 결, 삶의 본성에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곡진함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시를 떨게 하고 읽는이를 뜨겁게 울리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요즈음 씌어지는 시의 사소함은 얼마나 시를 얄팍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시뿐일까요. 사소한 글, 폭력적인 글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시와 글은 사소한 끼적임이 아닙니다. 악당도 아니고 괴물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런데 마치 악당과 괴물처럼 보이는 글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부리는 자의 몸과 맘이 글에게 이와 같은 악역을 맡기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절이 너무 비이성적이고 혼란스러워 그럴까요. 최근에는 글에 비아냥거림이 자주 들락거립니다.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마치 글의 목적이 비난인 것처럼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잘못된 태도이고 잘못 지어지는 글이라고 봅니다. 비아냥은 글을 다치게 만들고 다친 글들은 사람들을 해칩니다. 왜 글에게 이런 짓을 시킬까요. 제발 글을 학대하지 마시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글로 비아냥거리는 자야말로 비겁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글을 학대하는 이들에게 저는 이 시를 들이밀고 싶습니다. “이상하제 머리가/ 돌아갈라케도 안 돌아간다/ 히안하지/ 나는 아예 안 할라꼬/ 생각했는데 비도 안 한다/ 됐다고마” 정숙자 할매의 〈됐다고마〉라는 시입니다. 시를 쓰고 싶은데 생각은 나지 않고 그래도 어찌 해볼까 하고 붙잡지만, 글자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됐다고마!”할 밖에요. 그러나 정말 할매의 속마음도 “됐어, 안 하면 될 거 아니야!”일까요. 속마음마저 “됐다고마!”였다면 이 시는 태어날 수 없었겠지요. 귀여운 푸념과 안타까운 해학이 절로 스며 있지 않은가요.
질식할 것만 같은 시절입니다. 스스로 닦지 않으면 ‘나’와 ‘나의 시’가 회복 불능상태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시가 뭐고?』에서 느껴지는 삶과 시의 순정한 첫 마음을 다시 살피며 우리의 오늘을 견디어 나가야겠습니다.
★ 이 글은 2016년 2월 1일 작가회의 통신에 실린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