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한 야당 의원이 자신이 속했던 당을 떠나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말은 “지나친 투쟁주의 노선과 낡은 진보로는 오늘날 다변화된 사회와 무한 경쟁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탈당의 변을 들으면서 씁쓸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과연 지금의 야당이 지나친 투쟁주의 노선을 취하고 있는가? 낡은 진보라는 것이 있는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의 주장에 내가 반감을 가진 것은 얼마 전에 읽은 서경식의 『시의 힘』(서은혜 옮김)이 들려준 목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경식은 시인이란 침묵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역설하면서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이 사회에 소외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상,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는다.”(155쪽)고 말했다. 시의 힘은 승산이나 효율성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 시인과 정치인이 지향하는 가치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움직이는 일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추구할 가치인 것이다. 서경식은 “그러한 시는 차곡차곡 겹쳐 쌓인 패배의 역사 속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패자에게 힘을 준다. 승산 유무로 따지자면 소수자는 언제나 패한다. 효율성이니 유효성이라는 것으로는 자본에 진다. 기술이 없는 인간은 기술이 있는 인간에게 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원리로서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거나, 이럴 수가 있다거나, 이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을 움직인다.”(110~111쪽)고 부연하고 있다.
서경식의 주장에 공감하는 나는 근래에 탈당하는 의원들이 내세우는 온건 합리며 중도 개혁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상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독재 정치가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맞서는 대응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 기관의 대선 개입은 물론이고 통합진보당의 강제 해산, 세월호 참사,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노동법 개악, 예술가들의 작품 검열, 굴욕적인 위안부 협상 등등에서 보듯이 우리의 현재 상황은 총체적인 난국이다.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고 있고 법치주의는 무너졌다. 금수저, 갑질, 헬조선 등의 신조어가 유행하듯이 사회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있고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청년들에게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인은 물론 시인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승산이나 효율성을 추구하기보다 역사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진리나 미의식은 역사의식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조지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을 때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다고 토로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시인이라면 역사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써야 하는 것이다.
서경식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나에게/조국을 이야기할 언어가 없다/나에게/조국을 느낄 살갗이 없다//하지만 나는 언젠가 들었다/동양의 진창에서 피를 흘려가며 부르던/혼잣말처럼 나직한, 그러나 사라지지 않을/조상들의 노래//들이밀어진 칼날 앞에서/짓밟힌 군화 아래서/태어나 노래하는/내 아버지들 내 어머니들”(「역사」, 전체 9연 중 2~5연)이라고 썼다. 재일교포 학생 모국 방문단에 참가해서 가난하고 소란스럽고 비위생적이고 군사 독재의 공포에 짓눌린 조국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노래한 것이다. 목격자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자의 길로 들어서려고 다짐한 것이다. 시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분명하지 않은가.
★ 이 글은 2016년 1월 18일 작가회의 통신에 실린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