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에 새 구두가 놓여 있었다. 아내가 사다 놓았다는 트레킹화였는데 구두끈이 보이지 않았다. 새것이어서 따로 두었겠지 싶었다. 하지만 며칠째 손이 가지 않았다. 신고 다니는 구두와 ‘결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2년 넘게 신고 다녀 뒷굽이 닳고 발목 부분이 조금 낡았지만 발이 여간 편한 게 아니었다. 며칠째 눈길을 주지 않자 아내가 “이거 아주 편리한 건데”라며 구두를 가져와 신어보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구두끈이 있었다. 낚싯줄처럼 가늘었다. 그런데 매듭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핸즈프리”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발뒤꿈치에 끈 조절장치가 튀어나와 있었고 그 밑으로 작은 바퀴가 숨어 있었다. 손을 대지 않고 신고 벗을 수 있는 구두라…. 조금 난감했다.
나는 신발에 예민한 편이다. 발볼이 넓은 데다 발등까지 튀어 올라서 웬만한 구두는 신지 못한다. 그렇다고 맞춰 신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신발’을 만났다. 6년 전 5월, 선배 문인들과 제주 올레 행사에 참여했을 때였다. 서귀포 바닷가를 걷다가 쉬는 참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선배가 트레킹화를 벗는데 ‘따르륵’ 소리가 났다. 끈을 풀지 않고 발등 바깥쪽에 달린 동그란 단추를 돌리는 것이었다. 단추를 앞으로 돌리면 끈이 조여졌다.
제주도에서 돌아오자마자 백화점으로 달려가 신발을 바꿨다. 그날부터 다른 구두는 신지 않았다. 발을 조이지 않는 것은 물론 바닥에 쿠션이 있고 재질 또한 고어텍스여서 생활 방수에 통기성까지 있었다. 타거나 달리는 것보다 걷기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안성맞춤이었다. 편한 트레킹화 덕분에 틈만 나면 자주 걸었다. 걸으면서 ‘엉뚱한 생각’, 소위 시상詩想을 많이 떠올렸다. 늦여름 해가 질 무렵, 홍릉 은행나무 길을 걸을 때면 어릴 때 부르던 동요가 흥얼거려지기도 한다.
며칠 전부터 새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 이런 의구심이 생겼다. 구두까지 핸즈프리여야 하는가. 문명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가 도구와 기계라면, 그리고 도구와 기계를 다루는 노하우를 기술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기술로부터 얼마나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는 것일까. 기술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기술을 인간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손 안 대고 구두를 신고 벗으면서 생태정치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너머를 사유한 앙드레 고르(1923~2007)를 떠올렸다.
고르의 저술 〈에콜로지카〉에 따르면 기술은 둘로 나뉜다. 고르는 기술을 열린 기술과 닫힌 기술로 양분하는데, 전자가 인간의 자율성과 상호 연관성, 공유 관계를 증진한다면, 후자는 인간을 기술의 노예로 전락시킨다. 닫힌 기술은 그 작동 과정을 프로그램화하고 상품이나 용역(서비스)의 제공까지도 독점한다. 열린 기술의 대표적 사례가 대중교통 체계라면 닫힌 기술을 대표하는 것이 원자력 발전이다. 불행하게도 후기산업사회를 구성하는 기술은 거개가 닫힌 기술이다. 우리는 닫힌 기술이 만들어내는 상품의 구매자, 소비자, 폐기자일 따름이다.
‘고쳐 쓸 수 없는 것은 사지 말라’는 금언은 이제 사어死語가 되고 말았다. 가전제품은 물론이고 자동차도 수리가 거의 불가능하다. 부품을 교체하거나 새로 사는 게 상책이다. 게다가 제품의 수명도 매우 짧아졌다. 들리기로는 내구성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한다. 상품의 구매와 소비주기를 최대한 빠르게 하려는 기업 논리가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앙드레 고르는 이반 일리치의 긴급한 권고를 이어받아 ‘기술의 인간화’ 즉 공유 기술과 협동 제작을 강조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두 손을 들여다보는 일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우리 손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도구를 만들고 기계를 손질하던 우리의 손은 지금 리모컨이나 신용카드를 만지고 있다. 액정화면을 터치하거나 각종 버튼을 눌러댄다. 손은 이제 만드는 손, 만지는 손이 아니고 소비하는 손, 조작하는 손이다. 디지털 기술이 일상적 삶은 물론 우리의 뇌 구조를 바꿔나가면서 손의 거처가 바뀌었다. 손은 세계와 정신, 타자와 감정 사이를 떠나 기계와 몸 사이로 거주지를 옮겼다. 손이 인간과 기술 사이를 온전하게 매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페카 히마넨이 바라마지 않는 “우정, 사랑, 자유로운 협동, 개인적 창조성, 이런 것을 기쁨의 최우선에 놓은 삶의 방식”을 아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에도 허리를 굽히다가 흠칫 놀랐다. 끈을 조절하는 단추가 있는 줄 알고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일어섰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꼿꼿이 서서 발뒤꿈치에 달린 바퀴를 굴렸다. 그리고 뚜벅뚜벅 ‘핸즈프리의 멋진 신세계’ 속으로 출근했다.
★ 본 기고글은 경향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