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의 왕래가 잦은 대학 캠퍼스의 한 건물 계단 아랫목에 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다. 교정에 웬 항아리? 낯선 땅의 방문자처럼 항아리는 그 주변의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이 얹힌 작은 탁자도, 학생들의 발길이 콩콩거리며 바쁘게 오르내리는 계단도, 흰색의 벽면도 항아리와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항아리 앞으로 와서는 그 안에서 흰색의 종이 대롱 같은 것을 집어 들어 펼쳐 본다. 시다. 종이 대롱 안에는 시가 한 편씩 들어 있다. 그런 대롱이 항아리에 수북이 쌓여 있다.
누구일까, 교정에 시 항아리를 갖다 놓은 사람은? 시를 출력하고 대롱을 만들고 매일 그 대롱들을 가져다 항아리를 채우는 사람은 누구일까? 수소문해 보니 어떤 강의의 수강자 대여섯 명이 한 달쯤 ‘시 항아리’를 운영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한 달이라지만 학기 중에 이런 항아리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시간이 많이 든다. 시를 뽑아야 하고, 출력해야 하고, 출력지를 돌돌 말아 대롱을 만들고, 틈새가 벌어지지 않게 작은 스티커를 붙여야 한다. 그런 대롱이 하루에도 수백 개가 필요하다. 항아리에서 시 대롱을 집어 가는 학생이 하루 평균 300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항아리 주변 벽면에는 ‘고맙다’고 인사하는 스티커들이 즐비하다. “늘 마음이 바쁘고 불안했는데 참 고맙다. 시를 읽으니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기분이 너무 좋다.”
시 항아리를 운영하기로 한 학생들의 마음을 나는 알 것 같다. 이즈음의 대학생활은 20년 전, 30년 전, 아니 10년 전의 대학생활과는 다르다. 모두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다. 몸도 바쁘다. 학비 걱정, 취업 걱정, 성적 걱정에 마음이 잠시도 편치 않다. 시 항아리의 운영자들은 그런 친구들에게 편지를 띄우고 싶었으리라. 내 친구여, 친구들이여, 마음이 여유를 잃어야만 살 것 같을 시절에는 오히려 그 마음에 여유를 되찾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건 한가한 소리가 아니다. 친구가 친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시를 읽는 일은 그런 여유 되찾기의 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아픈 친구를 생각하고 낙엽에 인사하고 마른 나무에 물 주는 일이 아니겠는가?
학생들이 만든 시 항아리에는 윤동주의 시, 천상병의 시, 릴케와 헤세의 시도 담겨 있었으리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다는 시, 윤동주가 1941년에 쓴 ‘서시’의 일부다. 73년 전 시다. 그러나 이 시가 73년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누구나 알 법한 시, 친숙한 시, 가슴에 담고 외운 지 오래되었으면서도 늘 다시 우리에게 새록새록 다가오는 것, 그것이 시다. 손택수 시인이 올해에 낸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에서 ‘수묵의 사랑’을 노래하기 위해 쓴 구절 그대로다. “아주 와서도 여전히 오고 있는 빛깔”…온 지 수백 년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오고 있는 것 같은 수묵의 빛깔과 향내, 그것이 시가 우리에게 오는 모습이다. 그것이 시의 시간이고 시의 여유다. 사랑과 우정이 오는 모습도 그러하다.
윤동주 시인의 별은 인생 만사처럼 잠깐 타다가 사라지는 유한성의 별은 아닐 것이다. 시인의 별은 어떤 유구한 것, 오래되었으면서도 처음 같은 것, 영원한 것으로서의 별 같아 보인다. 그러나 유구한 것을 노래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유한한 것들(‘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 유구한 마음이 시의 마음이고 시의 관대함이다.
그러고 보니 소수의 학생들이 시 항아리를 앞으로도 계속 운영해낼 수 있을지가 슬며시 걱정스럽다. 아마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내년 봄 새 학기가 열리면 한 강의실 수강자 몇 명만이 아니라 여러 강의의 수강자들이 조를 짜서 운영하면 시 항아리를 유지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항아리에서 시 대롱을 얻어가는 사람 자기 자신도 대롱 하나씩을 만들어 와서 항아리에 넣어도 된다. 그러면 항아리에는 언제나 시가 넘칠 것이다. 샘물처럼.
★ 본 기고글은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