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네 단어로 된 이 선고는 지난 3월10일의 헌법재판소 탄핵심판을 요약한다. 짧고 분명하고 단호하다. 거기에는 어떤 모호성도 끼어들 여지가 없고 해석적 곡예도 허락되지 않는다. 지금의 생존세대는 평생 그 선고 문장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70년 헌정사에서 우리는 그처럼 충격 강도가 센 사건을 경험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충격은 교통사고 같은 단순 충격이 아니다. 긍정적 의미에서건 부정적 의미에서건 그것은 2017년 이후 한국인의 삶과 행동에서 분리시키기 어려운 정체성의 일부(“우리는 탄핵세대”)이다. 이 의미의 정체성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 운명적 주말을 넘기면서 우리는 ‘탄핵 이후’라는 문제와 정면으로 만나고 있다. 대통령 탄핵은 아픈 사건이다. 사회적 대가와 비용도 크다. 그 아픈 사건, 고비용 사건을 치르고 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과제는 무엇인가.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고 일의 완급 조절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과제는 누가 정하고 일은 누가 맡는가. 이미 촛불 넉 달을 건너오는 동안 우리 사회 구성원들과 구성요소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과제토론’이 전개되었고 토론은 지금도 속도와 열기를 더하며 계속되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조기 대선의 계절이다. 여러 사회단체와 정파들 사이의 과제 제시 경쟁도 치열하다. 어떤 의미에서 과제들은 지금 ‘차고 넘친’다. 어떤 과제들이 논의되고 있는지도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다. 토론 공간을 압도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의제 설정이며 그런 의제 프레임 안에서 이런저런 과제들이 규정되고 정의된다.
나는 이런 방식의 의제 설정이나 과제 정의가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천만의 말씀이다. 예컨대 적폐청산과 사회개조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 시급성의 요청이 높은 과제들이며 재벌개혁, 사법개혁, 언론개혁 같은 과제들도 그러하다. 사회통합도 위중한 과제다. 소득격차, 청년 고실업, 불평등 역시 우리 사회가 해결해나가야 할 숙제들이다. 문제는 이런 과제들이 칡뿌리처럼 서로 엉겨 있다는 점, 시급성으로 따지면 어느 것 하나 바쁘고 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중에 어떤 것은 오래된 것들이고 어떤 것은 그 형성의 시기가 비교적 짧은 것들이다. 정치, 경제, 사회의 제 영역들에서 이처럼 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주요 구성자들이 지난 수십년간 문제 해결보다는 문제를 만들고 해결을 미루는 데 더 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사회,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사회, 문제를 미루어놓는 사회, 곧 ‘미결사회’다.
나는 이 미결사회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 ‘탄핵 이후’ 시대의 시급하고 의미 있는 개혁과제라 생각한다. 물론 그것만이 가장 시급하다거나 가장 의미 있는 과제라는 소리는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미결사회적 체질을 그대로 유지하다가는 다른 어떤 개혁이나 개조도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그 체질 고치기는 말하자면 다른 과제들 못지않게 시급한 일이며 다른 과제들과 선후완급의 관계로 설정될 것이 아니라 각 분야에서의 시급한 개혁과제들과 ‘동시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소리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미결사회를 고쳐나가는 것이 모든 개혁 시도의 밑바탕에 필요한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작업이라 생각한다.
미결사회의 특징은 각기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는 다양한 사회구성원들과 구성요소들을 묶어줄 공통의 가치, 공통의 마당, 공통의 이상-말하자면 ‘사회적 공통성’에 대한 인식이 빈곤하거나 부재하다는 점이다. 공유가치에 대한 인식과 헌신이 없을 때 사회 통합은 무망하고 공정사회, 평등사회의 꿈도 요원해진다. 사회 통합은 돈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소득수준이나 계층간 차이에 관계없이 사회구성원들이 어떤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고 그 가치의 유지에 자발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면 사회를 지탱할 기본 동력은 생겨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생명 존중은 재벌, 노동자, 경영인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통적 기본가치에 속한다. 이런 기본가치의 공유 가능성을 넓혀나가는 것이 사회 통합의 지름길이다. 우리가 ‘헌법적 가치’라고 부르는 것들, 더 구체적으로는 헌법이 규정하는 인권, 언론과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권들은 헌법적 가치의 구체적 항목들이다. 이런 기본 가치들이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무시되거나 억압될 때 사회는 해체되고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소위 블랙리스트가 사회를 멍들게 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촛불시위의 가장 거대한 기여 부분은 그것이 시민들에게 공통의 희망과 공통의 약속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그 공유의 희망과 약속으로 몸을 데우고 에너지를 충전받을 수 있었다. 그 촛불 넉 달은 사람들이 오래오래 공유할 기억의 시간이 되어주었다.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이나 헌재의 탄핵심판도 세대와 지역을 넘고 성차를 넘어 많은 시민들이 평생 간직할 공기억이 되었다. 그 기억은 거대한 문화적 자원이다. 영상으로, 문자로, 노래와 춤과 이야기로 그 기억의 자원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일, 그것도 탄핵 이후 시민의 과제다.
★ 본 기고글은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