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죽었다. 사람 하나 없는 빈소에서 쓰러질 것처럼 가냘픈 그녀의 딸이 혼자서 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맑게 웃고 있는 영정 사진 앞에서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른, 마흔, 쉰… 그녀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녀는 볼 때마다 내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아주 오래전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그녀 곁에 다부진 표정으로 서 있던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험한 세상으로부터 엄마를 지키려는 듯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다부진 눈길로 낯선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딸이 상주가 되어 서 있었다. 그때가 일곱 살, 지금 스물일곱이 된 그 애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참 신기하고 슬프고 반가웠다.
오래전 그때 내가 물었다 “누구야?” “내 딸이야.” 내가 또 물었다. “소식도 없이 결혼했어?” “응, 더 늙으면 못 낳을까봐 그냥 낳았어.” 그래서 내가 또 물었다. “아빠가 누구야?”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내게 되물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우연히 다시 만난 그때부터 그녀와 나는 소식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과 sns를 주고받으며 나는 외롭다는 생각이 많이 없어졌다. 낯설면서 낯설지 않은 누군가들이 다양한 정보와 소식들을 전하는 걸 보며 혼밥을 먹는 일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일찌감치 부모님을 여의고 삼촌 집에 기거하며 화가의 꿈을 키우던 나와 달리, 그녀는 홀어머니지만 고등학교 음악 교사인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플루트 연주자로 성장했다. 그녀는 플루트를 아주 멋지게 연주했다. 나는 그녀가 플루트를 연주하는 풍경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다.
내가 선배가 하는 미술학원에서 허드렛일을 해주고 무료로 그림을 그리며 재수인지 삼수인지를 할 무렵, 대학생인 그녀가 그림을 배우러 왔다. 정신의 엑기스만 남은 깡마른 몸매의 그녀는 첫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았다. 바쁜 대학 시절을 보내며 틈틈이 그림을 그리러 오는 그녀는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했었다. 플루트는 어머니 때문에 어쩌다 그냥 하게 된 거라고. 그래도 나는 그녀가 플루트를 연주하는 모습이 황홀해서 꿈속에도 나타나곤 했다. 나는 계속 미술대학 시험에 떨어졌고, 결국 대학 문 앞에도 못 가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은 끝없는 재수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화가가 될 운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선배가 하는 카페에서 매니저 일을 맡아 하며 모은 돈으로 전람회도 몇 번 열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지인들이 전시를 보러와 축하해주었고, 여러 번 전시를 하다 보니 나름 팬들도 생겼다. 그림 그릴 시간도 많지 않지만 나는 붓을 놓은 적이 없었다. 밤이 되면 한 생이 끝난 기분이고 아침이면 한 생이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매일 혼자 말을 한다. 나는 위대한 화가로 남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생에서 나는 나와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승리할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반 고흐나 모네처럼 존경하고 사랑하는 화가가 될 것이다. 이런 얘길 남에게 해본 적은 딱 한 번뿐이다. 다들 미친 게 틀림없다고 할 테니까. 하지만 그녀만은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림은 말 못 하는 짐승 같다. 반려동물 같기도 하다. 말 없음으로 말을 전달하는 신기한 정물 같기도 하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그림을 잘 안 그린다. 물감값이 너무 비싸서인지도 모른다. 어디를 가나 움직이는 영상 설치가 유행이다. 움직이는 데다 난해한 의미로 가득 찬 영상과 소리 들 앞에서 말 못 하는 그림의 세계로 승부해야 한다 생각하니 외로워진다. 얼마 전 ‘에드 아스트라’라는 공상과학영화를 보았다. 영어로 ‘에드 아스트라’란 ‘갖은 고난을 거쳐 별까지’라는 뜻이라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 갖은 고난을 거쳐 도달한 우주에는 금성에도 수성에도 목성에도 해왕성에도 그 어디에도 고독하고 광활한 사막만 존재할 뿐, 생물체도 식물도 그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우주탐사를 해도 황폐해진 지구를 떠나 이사를 갈 수 있는 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영화는 전하고 있었다. 에드 아스트라, 그 말을 들으니 오래 산다는 것은 먼 별까지 걸어간다는 뜻이라고 말했던 반 고흐의 말이 생각난다. 에드 아스트라, 고난을 거쳐 먼 별까지, 그게 바로 예술의 길인 것이다. 오랜만에 물감을 사러 갔다가 너무 비싸서 제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가격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가 얼마나 훌륭한 화가인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끝까지 화가임을 그만두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미쳤거나 바보거나 철학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산다는 것은 거절당하는 일을 연습하는 것이다.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해질 법한데도 오늘도 나는 거절당하지 않을까 불안해진다. “선생님 그림이 우리 화랑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만.” 등등. 하지만 “우리 미술관에서 선생님의 회고전을 기획하려 합니다만.”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그것도 세계 유수의 휘트니 미술관이나 구겐하임 정도에서 말이다. 몇 번 그곳들에 가보았다.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내 작품들로 전시된 상상의 공간을 걸어가며 언뜻 현실로 돌아올 때마다, 걸려있는 작품들 중에서 나보다 훌륭하고 독창성이 있는 작품은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말하면 그녀가 “맞아. 그렇고말고.” 하며 맞장구를 쳐줄 것만 같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도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다. 미국 영화 속의 ‘테드 곰’ 인형처럼 나쁜 놈이 몸을 반으로 찢어 곰 인형 속의 솜들이 다 밖으로 삐져나와 죽었다 해도, 잘 꿰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되살아날 것만 같다.
그녀와 나는 친구였지만 몇 번쯤 데이트 비슷한 걸 하기도 했다. 나의 열등감과 과대망상으로 뭉뚱그려진 끝없는 말들을 그녀는 참 잘 들어주었다. 한참 떠들다 보면 그녀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이 바로 앞에 앉은 나보다 그녀와 가까워 보였다. 그 시절 나는 그녀의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질투했던 것도 같다. 어느 초겨울 술 한 잔을 마시고 용기를 낸 나는 그녀를 불현듯 껴안고 입술에 키스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는데 그녀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그녀와 연인이 될 것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편지를 해도 답이 없었고 학교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려도 만날 수 없었다. 가슴앓이를 충분히 했다 싶은 어느 날, 나는 뉴욕의 줄리아드로 유학을 떠난 그녀로부터 편지와 영어로 쓰인 책 한 권을 받았다. 그녀가 보낸 책은 영어로 쓰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번역서로 읽기에도 어려운 책을 영어로 읽으라는 그녀의 깊은 뜻이 궁금했다. 나는 그 제목이 너무 좋아서 책을 가슴에 꼬옥 안고 잠들기 일쑤였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두꺼운데도 그리 무겁지 않은 책의 냄새가 내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 같았다. 편지 속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세기의 작가인 프루스트는 남들이 볼 때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같이 보였지만, 자기 내면의 언어를 일생의 업으로 삼고 써 내려간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고. 너도 꼭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사전을 찾아가며 나는 몇 페이지 읽다 말고 또다시 몇 페이지 읽다가 말고, 그러기를 수백 번 되풀이했고 결국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 책은 어디에 있을까?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을까?
내게 예술가가 되는 길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성공할 것인가? 그 질문에 회의적이라 해도 가던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이게 옳은 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친구들은 말한다. 독립이란 이 공기 나쁜 지구를 떠나 산소 가득한 살 만한 낯선 우주에 도착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라고. 이럴 때 소중한 친구는 지 딴에 알량한 거지 같은 바른말을 하는 재수 없는 인간보다는 “넌 할 수 있어. 독립의 길은 멀지만 너의 붓질 하나하나가 살 만한 우주로 가는 소중한 발걸음이지.” 이렇게 먼 별처럼 용기를 주는 친구다. 그녀가 그랬다. 그래서 나는 늘 그녀를 잊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