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편지를 받고 가슴이 먹먹해져서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참 좋아했던 은사님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고통 속에 견디고 계신 병원의 고층 창밖을 내려다봅니다. 신도시 건설을 하느라 포클레인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삭막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한정된 도시의 영토에 신도시를 자꾸 만들어내듯, 내 마음 안의 신도시를 매 순간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고, 그게 사는 거라고 자신에게 속삭입니다. 어쩌면 사막을 간척해서 문명의 오아시스를 만든 멋진 사막도시들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여기 너무 오래 있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을 것이다.” 하던 당신의 말이 마치 내가 한 말처럼 들려오면서, 우리가 만드는 마음속의 신도시들은 매 순간 넓어져 가서 거기만 다 돌아다니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그렇게 반대로 생각해봅니다. 병실에서 언제 숨을 거둘지 모르는 노인의, 사망까지의 고통스러운 순간들과 가족들의 희망 없는 기다림을 지켜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 아기가 나올지 모르는 것처럼 언제 숨을 거둘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 아니 알아야 하는 것은 언제든 무엇이든 결국은 끝이 난다는 것이고,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죽고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는 삶의 애틋한 순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고독한 시간을 혼자 보내는 사람과 가족과 함께하는 사람의 고통은 어떻게 다를까? 맥박의 숫자를 가리키는 컴퓨터화면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그래프가 한 줄로 삐 하며 정지하면 끝이지요. 그 지루한 단말마의 고통을 조금도 줄여줄 수 없는 게 너무 슬펐습니다. 왠지 북유럽의 선진화된 의료상태는 마지막의 고통을 줄여주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 밤을 넘기는 일이 마치 가파른 산을 정복하는 일 같았어요. 그것도 죽음이 정상 꼭대기인 희망 없는 등산이라니. 그 많은 생각들 끝에 잠시 병실을 나와 신도시 건설이 한창인 창밖을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노인이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유난히 효심이 지극한 나이든 남매가 통곡을 시작했고 나도 따라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동안 세상을 떠난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세상의 모든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어요. 하염없이 울다가 문득 98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고인의 죽음 앞에 너무 많이 슬퍼하는 일은 왠지 이기적인 일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고아가 된 사람도 어릴 적에 부모가 돌아가신 사람도, 아니 젊은 날에 세상을 떠난 얼마나 아까운 목숨들이 봄마다 꽃으로 피어나는데, 백 년을 산 고인의 죽음을 도리어 축복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을 품고 병원 문을 나왔습니다. 내가 그림과 마술을 지도했던 사랑스러운 간호사 아가씨의 연인, 아랍계 혼혈의 사내 얼굴이 문득 떠오릅니다. 결코 나쁘지 않았던, 하지만 유난히 말이 없었던 그가 IS가 되어 떠났을 때도 깜짝 놀랐지만, 그런 일을 벌였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어요. 하긴 우리 안에도 자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숨어있을 테지요.
문득 영화 『바그다드 카페』 속의 뚱뚱한 여주인공과 전혀 소통이 불가능한 남편이 여행길의 사막에서 자동차가 고장이 나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녀가 남편 곁을 떠나 하염없이 걸어서 사막에 엉뚱하게 놓여있는 『바그다드 카페』에 들리게 되는 장면 말예요. 그 남편은 내 기억이 옳다면 그냥 영화 속에서 스윽 없어지는 그런 존재이지요. 실제로 죽이지 않아도 내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이 저절로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카오의 카지노 딜러를 사랑한 전남편이 그렇게 사라져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나의 착한 친구, 그녀의 IS 연인도 그냥 슬며시 지워지는 그림 속의 사람처럼, 세상 밖으로 스윽 사라져버리는 마술을 걸어봅니다.
요즘 이곳은 사람들이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걸어갑니다. 왠지 내 마음이 더 추워집니다. 서 유럽인들이 햇빛에 굶주려 해만 나면 벗고 누워서 일광욕을 하듯 우리도 곧 맑은 공기에 집착하는 날이 올 것 같습니다. 태양을 바라보고 누워 온몸에 골고루 태양 빛을 받는 것처럼, 마스크를 쓰는 것 보다 적극적인 공기채집은 불가능할까? 창문을 여는 일의 고귀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오늘입니다. 맑은 공기든 깨끗한 물이든 전쟁 없는 평화든, 우리는 그게 뭐든 없어 봐야만 소중함을 깨닫는 어리석은 종자인가 봅니다. 당신이 있는 그곳은 흙먼지는 날릴지언정 미세 먼지는 없겠지요? 이렇게 산들 저렇게 산들 두 번 사는 일은 불가능한데 한 번뿐인 삶을 두 번 사는 것처럼, 선물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 그 방법 중에 하나는 영화를 많이 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가 나온 이후 다른 삶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의 삶은 세배로 길어졌다고 누군가 말한 생각이 납니다. 오늘은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었어요. 누군가 앵무새 한 마리를 몰래 외투 속에 품고 들어왔더군요. 영화 제목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일본영화였어요.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앵무새가 떠들기 시작했어요. “씨발 좆나 재미없네. 씨발 좆나 재미없네.” 사람들은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고, 누군가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러자 바바리맨처럼 커다란 외투 속에 앵무새를 감춘 남자는 상영관 밖으로 사라졌어요. 대형 쇼핑몰에서 애견을 데리고 다니는 풍경은 이곳에서는 흔한 풍경이지요. 개를 데리고 극장을 가는 날도 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앵무새를 데리고 영화를 본들 또 어떻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시각장애자가 맹인견을 데리고 극장에 가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요. 영화는 앵무새의 말처럼 그렇게 재미없지는 않았어요. 대사 중 이런 말이 인상에 남더군요. “아주 나쁘고도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행복하다.”
고대인들은 어디가 아플 때, 동물의 같은 부위를 먹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대요. 이를테면 췌장에 문제가 있을 때 동물의 췌장을 먹으면 낫는다는 식이죠. 이런 대사도 인상적이었어요. “나는 역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네 안에서 영원히 살게. 누군가가 나를 먹으면 내 영혼이 그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된데.”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언잰가 이 영화를 한 번 더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요즘은 오래전에 본 영화를 다시 보는 습관이 생겼답니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볼 때 놀라는 것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영화 장면들의 신선함 때문이어요. 도대체 이걸 보았다고 할 수가 있는 걸까? 어쩌면 같은 삶을 두 번 산다 해도 이런 기분은 아닐까?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 처음 보는 것과 다를 게 없을 뿐 아니라 내용과 결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저 따뜻했다거나 배경 화면과 배우의 표정과 대사가 인상적이었다는 희미한 분위기만 기억할 뿐은 아닐까? 독서도 여행도 연애도 결혼도 이혼도 다 그럴지도 모르죠. 삶과 죽음까지도.
우리가 두 번째 보는 영화가 이렇게 처음 본 듯 새로운데, 두 번 똑같은 삶을 산다 한들 우리는 첫 번째 삶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삶에는 연습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어느 영화에선가 본 이런 문장이 생각났어요. 우주비행사의 암호였던 것 같은데, “토성의 고리는 우주의 결혼반지다.”라는 뜬금없는 문장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그건 마치 당신과 사랑스러운 내 친구, 간호사 그녀의 안녕을 비는 마법의 주문 같은 거였어요. 문득 천수 관음상을 떠올립니다. 어릴 적 절에서 본 천 개의 손을 가진 부처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몇 날 며칠 꿈속에 나타나곤 했답니다. 어른이 되어 알고 보니 그 손은 무서운 손이 아니라 고마운 손이었어요. 세상의 불쌍한 중생들을 도와주려면 천 개의 손도 모자라지요. 내게도 천 개의 손이 있어 사람들의 아픈 몸과 마음을 쓸어주고 싶네요.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 이곳이 아니면 어디라도 좋을 것이다.” 하는 당신의 헤맨 마음도 내 여러 개의 손으로 꼭 잡아주고 싶은 해 질 무렵입니다. 당신은 이제 어디로 갈 건가요?
어디로 가든, 어디에 있든 행복하길 빕니다.
문득 이런 말이 떠오르네요. “오래 살수록 행복해진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우리의 삶도 그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