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때는 당신의 편지를 읽을 때입니다. 당신이 어두운 이야기를 할 때도 나는 가끔 웃음이 납니다. 나는 그게 마술이라 생각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을 그렇게 밝은 세상으로 바꿔주는 마티스의 그림이 마술이듯이. 당신이 한동안 마술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서 뚱뚱한 여주인공이 사막에 사는 지루한 사람들을 위해 마술쇼를 하는 모습도 겹쳐 떠오릅니다. 자신만의 마법을 지닌 사람들은 속임수가 필요 없다는 누군가의 말도, 예술은 사기라는 말도, 어쩌면 같은 말일지도 모르지요. 세상의 어둠을 환하게 칠하는 당신의 그림이 눈 안에 햇살처럼 퍼져 들어오네요. 매 순간 피 흘리는 사람들을 대하며 살아가는 것도 익숙해져, 환한 햇빛 아래 서면 오히려 현기증이 날 때가 있어요.
당신이 보내준 그림이미지들이 너무 환해서, 모두를 환하게 비추는 공평한 세상의 햇살이 너무 밝아서 문득 어지럼을 타는 자신을 느낍니다. 박쥐가 물을 먹는 방법을 아세요? 해가 지기 시작하고 어둠이 내리면 박쥐들은 동굴에서 나와 강을 향해 곤두박질치지요. 그렇게 물속에 곤두박질치면서 물을 흡수하는 겁니다. 황혼은 동굴 밖 세계와 동굴 안 세계를 연결하는 신비로운 시간의 고리랍니다. 생명을 건 박쥐의 갈증 뒤에는 악어들의 긴 기다림이 존재하죠. 강물 안에는 악어들이 박쥐를 포식하려고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들 있는데, 해가 질 무렵이면 박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오늘도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도 이와 다르지 않을 테지요. 그 위험을 매 순간 느끼면서 산다면 어떻게 삶을 영위해 나갈 수가 있겠어요? 그 반대로 고마움도 사랑도 다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지요. 물을 먹는다는 당연한 일상도 따지고 보면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마실만한 깨끗한 물이 부족해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세요.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건 다 선반 위에 올려두고 없는 것에만 골몰하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보면 있는 것이 신기해지기도 한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척박하다고 마음속으로 늘 투덜대면서, 난 아무도 살지 않는 낯선 우주의 우주선 안에 혼자 있는 걸 상상하곤 합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일도 여행이지요. 내가 모르던 낯선 자신과 만나는 일은 전쟁터 안에 있을 때 더 확연히 느껴집니다. 모든 전쟁의 목적은 그저 살아남는 거라고 누군가 말한 기억이 나네요. 눈앞에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가 아니라도 피 흘리는 사람들이 수없이 실려 들어오는 이곳에서의 삶은 매일이 전쟁터입니다. 이런 삶도 이제는 익숙해져 내일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는 편리한 습관이 생기지요. 오직 현재에 머무르는 법을 배우게 된다 할까요? 이곳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에 앉아 슈베르트를 듣는 순간, 고향에서나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순간, 이 한없이 평화로운 순간들에 머무르는 법을 나는 이곳에 와서야 제대로 배웠답니다. 원할 때면 언제든지 기쁨과 행복의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동양의 수행자들이 닮고 싶어지네요.
미국에 불교를 정착시킨 이들 중의 상당수가 60년대 히피들이었다는 걸 아세요? 히피들이 마약을 복용하며 즐긴 환각 상태를 불교에서의 열반과 동일시하는 어처구니없는 착각의 시대, 하긴 극과 극은 멀리서 보면 비슷해 보이니까요. 최첨단 문화현상으로서의 히피들 중에는 심지어 ‘깨달음 알약’enlightment pill을 만들겠다는 이들도 있었답니다. 진짜 깨달음 알약을 만들 수 있다면 세상에 전쟁과 폭력과 복수를 일삼는 모든 영혼들에게 한 알씩 나눠주고 싶네요. 불교에서의 평상심이란 기독교에서의 가난한 마음과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물론 이슬람에도 이런 감정 상태의 이름이 있을 거예요.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아무리 천국에서라 해도 행복하지 않을 테지요. 매 순간 눈사람처럼, 다 쓴 비누처럼 녹아내리는 우리들 삶의 순간들을 떠올리면, 이 사라져가는 시간의 장송곡을 아무렇지도 않게 평상심을 지니고 들을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있는 자만이 자신을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오래전에 읽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중의 한 구절이죠. 하루가 다 지나가 버린 황혼 무렵, 오늘도 나는 벽에 걸린 당신의 그림을 바라보며 지구에서 머물 수 있는 하루가 또 사라지는 슬픔을 묵묵히 견딥니다. 그리고는 박쥐들의 갈증을 느끼기 시작하죠. 병원이라는 동굴 속을 빠져나와 세상의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치고 싶은 시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바다는 보이지 않고 내 안의 뻥 뚫린 동굴이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저녁 무렵, 당신과 마주 앉아 와인 한잔하고 싶네요. 생각보다 이곳의 와인은 무척 질이 좋답니다. 무게감 있는 붉은 와인 한 모금이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은 나를 살아있게 합니다. 와인을 좋아하면서도 내가 술을 자제하는 까닭은 하루 종일 술을 마시던 아버지의 기억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술버릇은 가끔 우는 것이었는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우울해졌어요. 어릴 적부터의 습관적 우울증이 지금도 가끔 되살아나요. 이민자였던 우리 아버지는 술이 그를 먹는지 그가 술을 먹는지 모르는 『어린 왕자』 속의 주정뱅이처럼 늘 술을 마셨어요. 그래서 오히려 술을 자제하는 능력이 생긴 나는 우울을 그저 껌처럼 씹는 버릇이 생겼죠. 어쩌면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 고통을 겪는 당신들 자매가 앓고 있는 병도 복잡한 종류의 우울증의 하나일지 몰라요. 세상과 불화하는 마음이 소음으로 들리는지도 모릅니다.
문득 전설적인 그룹 비틀즈의 존 레논이 생각나네요.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힌 우울증도요. 존 레논은 어릴 적 선원이던 아버지가 멀리 떠나고 어머니도 곧 떠나버려 이모와 이모부 사이에서 성장했다고 해요. 어머니와 재회했을 때, 술 취한 경찰차가 들이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한 어머니의 기억은 그의 마음속에 치유할 수 없는 아픔으로 자리 잡습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예술적 열정을 물려주고 음악의 매력을 일깨워준 뮤즈였다고도 하네요. 어쩌면 일곱 살 연상이던 아내 오노 요꼬는 존 레논의 마음속에 되살아난 뮤즈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건 1966년, 전위미술가인 그녀의 전시회에서였대요. 문득 소호의 작은 갤러리에서 당신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녀에게 푹 빠진 존 레논은 1968년 오노 요꼬와 결혼하게 되죠. 비틀즈의 양대 산맥이던 폴 매카트니는 존이 요꼬와의 사랑에만 치중하고 비틀즈를 등한시한다고 여겨 그들의 내부분열은 극에 달해 결국 해체를 맞습니다. 그 시기와 맞물려 그는 요꼬와 함께 베트남 반전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 내의 반전 분위기를 북돋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후 솔로로 활동하던 그는 우울증에 빠져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은둔생활로 들어가 5년 동안 주부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1980년 10월에 음반을 내고 다시 음악 활동을 시작한 지 두 달 뒤인 12월 8일 월요일, 녹음을 끝내고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그는 맨해튼의 자택 다코타 아파트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조현병 환자의 38구경 리볼버 총에 맞아 죽음을 맞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후 범인은 “관심을 끌기 위해 그랬다. 존 레논의 명성을 조금 훔쳐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랬다”고 진술했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30년 넘게 현재까지 교도소에 갇혀있다 하네요.
존은 죽기 전에 마치 자신의 삶을 예언하듯 마지막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어라. 인생은 달리기가 아니다. 경주는 끝났고, 너는 그 경주에서 승리했다.” 참 맞는 말이죠. 누구나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이라고나 할까요? 긴 머리의 존 레논과 오노 요꼬가 서로를 껴안고 찍은 그 유명한 누드사진을 기억하나요? 그 우울한 사랑의 분위기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영혼의 박제 사진이지요. 그가 심리적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프라이멀 스크림 요법primal scream therapy이라는 게 있었다 해요. 억압적 고통을 표면으로 불러내어 원초적 비명을 지르게 함으로써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이라는데. 실제로 그는 이 치료를 오래도록 받고 자신과의 내적 화해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언니와 함께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소리를 질러보는 건 어때요? 자신의 소리가 가장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릴 때까지 소리를 질러보는 거예요. 하긴 자신과의 내적 화해의 결과는 당신에게는 그림으로 존 레논에게는 노래를 만드는 일로 나타났겠죠.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노래들 중의 하나가 어머니, 「MOTHER」라는 노래랍니다. 평생의 우울을 관통하며 그가 만든 노래 말들은 언제나 우리의 영혼을 울리죠. “나는 마법을 믿지 않는다. 나는 엘비스를 믿지 않는다. 나는 비틀즈도 믿지 않는다. 꿈은 끝났다. 나는 바다코끼리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저 나 자신 존이다.”
하지만 자신의 노래 안에 마법을 불어넣어 사람들을 매료시킨 존 레논은 자신이 속임수 없는 진짜 마술사였다는 걸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 누가 우울하지 않은 영혼이 있을까? 우리는 우울로 인해 고통받고 되살아나며 전진하기도 하죠. 만일 우리가 죽지 않도록 설계된 생명체라면 그래도 여전히 우울할까요? 어쩌면 인생의 유한하므로 야기되는 우울증보다 더 큰 영혼의 불치병을 앓을지도 모르죠. 매일 단 하루만 더, 하루살이의 열정과 성실을 다해. 그저 오늘 하루만 잘 살자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꼭 남기고 싶은 말 한마디가 있다면, 나는 이런 말이라고 생각해요. “좀 늦었지만, 나는 꿈을 이루었다.” 당신도 그렇겠지요. 이 세상 그 누군들 이런 말을 남기고 싶지 않을까요? 여기서 나는 나를 포함한 나 이상이며,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생명 프로젝트며, 나는 그 프로젝트의 일환일 뿐이라고.
그리고 내게 묻습니다. 너의 꿈은 뭐냐고? 수술을 할 때마다 내 손의 마술을 믿으며, 하나라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기를 기도해요. 위험한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환자가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서는 발걸음, 나의 꿈은 그 발걸음 안에 있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벽에 걸린 당신의 그림을 바라볼 때 전쟁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긴 평화를 느낍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의 단 하나뿐인 삶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감각만 간직한다면, 잘 되어도 잘 못 되어도 그 자체로 좋은, 흥해도 망해도 그뿐인, 그 자체로 다 예술작품이며 종교 경전인, 짧지만 동시에 긴 여행일 거라 생각합니다.
생각이 길어졌네요. 내 친구, 오늘도 평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