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은 했지만, 당신이 그렇게 극도의 위험 속에 있었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위험이 일상화된 이곳에서와는 또 다른 완전한 평화 속의 돌발적인 위험, 어쩌면 그것은 모든 생물체가 지닌 숙명인지 모릅니다. 그 알 수 없는 불안한 내일을 배경으로 ‘인간은 선물하는 동물이다.’라는 당신의 말은 내겐 여전히 슬프게 들립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슨 선물을 할 수 있을지 하루 종일 생각합니다. 가까이 있다면 매일 꽃을 보낼 수도 있으련만, 그 흔한 꽃 선물을 떠올리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죽어 나가는 시신을 볼 때마다, 지금 살아있는 꽃의 생명이 더욱 눈부시기 때문입니다. 하긴 세상에 꽃이 아닌 게 있을까요? 삶도 사랑도 어쩌면 죽음까지도 다 꽃이지요.
꽃을 생각하니 간호사 아가씨가 떠오르네요. IS에 가담해 떠난 남자친구를 찾으러 그 먼 길을 떠나왔던, 당신과 참 친했다는 그녀가 며칠 전 돌아왔습니다. 누군가 봤다는 말을 듣고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녀도 남자친구는 없더랍니다. 아마 죽은 게 틀림없는 모양이라고 그녀는 지친 얼굴로 말했어요.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을 겪으며 찾아다녔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더군요. 그녀를 위안해주느라 와인 한 병을 같이 마시며 밤새 그녀의 남자친구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를 번갈아 하느라 먼동이 텄네요. 누군가로부터 시리아 락카Raqqa 지역에서 남자친구를 보았다는 말을 듣고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없는의사회의 일원으로 락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IS들이 갖은 만행을 저지르고 철수한 뒤였답니다. 약화되어 뿔뿔이 흩어진 조직으로부터 도망쳐 남자친구가 레바논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레바논 국경으로 들어선 그녀는 꽃 한 다발을 안고 위험한 길거리에 서 있는, 시리아내전을 피해 국경을 넘어온 수많은 시리아 난민 아이들을 보았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꽃을 파는 치자 꽃 소년들이 자정이 넘은 시각에 한 손에 장미 꽃다발을 다른 한 손엔 치자 꽃다발을 들고 서 있더래요. 소년에게서 치자 꽃 한 다발을 사며 이 늦은 시간에 언제까지 서 있을 건지 물어보았대요. 꽃을 다 팔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열 살 먹은 소년을 보며 그녀는 눈물이 멈추지 않더랍니다. 절벽 길 도로 위에서 운전자들에게 꽃을 파는 소년들이 사방에 깔려있더래요. 삶과 죽음만큼이나 꽃과 전쟁은 정반대의 단어가 아닐는지요. 문득 세상의 모든 꽃을 다 당신에게 보내고 싶어집니다. 간호사 아가씨는 남자친구를 찾는 일에 동행해 준 국경없는의사회의 일원인 미국인 의사와 돌아올 때쯤엔 서로 호감을 느끼는 사이가 되었더랍니다. 분명히 갈 때는 애절한 마음으로 찾아 떠났는데, 돌아올 때 남은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찾는 위험한 일에 동행해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군요. 참 잘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으며 또 한 번 슬픈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늘 그렇게 뜻밖의 흐름으로 흘러가는지도 모릅니다. 눈에서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그 평범한 진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또 먼 산을 바라봅니다.
오늘도 카불에서는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네요. 이제 누군가 죽었다는 말은 일상용어가 되어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무덤덤한 가슴인데, 죽은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나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게 이곳의 현실인데, 당신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나는 꽃의 마음이 됩니다. 이 청정하게 살아있는 행복한 글쓰기는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도 빼앗길 수 없는 삶의 선물입니다.
이슬람국가IS의 살해전담조직인 비틀스Beatles라는 이름을 들어봤나요? 인질 참수로 악명을 떨친 이들은 그 전설적인 영국 밴드 비틀스처럼 영국 국적의 대원 네 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강한 억양의 영어를 사용해 IS 내에서도 비틀스라고 불렸답니다. 지금은 쿠르드민병대와 미군이 협력하여 잔당을 일망타진했지만, 그 아름다운 영혼을 노래한 비틀스와 같은 이름으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일을 했다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비틀스 대원들 중 마지막으로 체포된 코테이는 가나와 키프로스에서 영국으로 이민한 부모 아래 태어났고, 엘세이크는 수단인 부모와 함께 런던으로 이주한 사람이래요. 우리 간호사 아가씨의 남자친구도 터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라더군요. 하긴 나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 아래 태어난 이 세대이지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고 내가 의사가 된 뒤에야 아버지의 슬픈 고향 아프가니스탄 땅을 밟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어요. 어릴 적 들었던 아프가니스탄 건국설화에 의하면 신이 온 세상을 창조한 뒤 남은 쓰레기를 던지니 그 먼지가 모여 아프가니스탄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마저 버린 땅’이라는 뜻만 들어도 이곳은 왠지 비극적인 기운이 감돌죠. 18년째 끝나지 않는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45세 내외이며, 40대만 되어도 노인 취급을 받곤 한답니다. 한집안에서 큰아들은 정부군 소속으로 작은아들은 탈레반으로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일도 다반사죠. 대부분의 농토는 유실되고 원유도 바닥이 나, 유통되는 농작물이라곤 양귀비 정도로 카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아편굴이라고 해요. 19세기부터 강대국의 영토전쟁에 휘말렸던 참 슬픈 나라 아프가니스탄, 불교적으로 길게 보면 모든 인간의 알 수 없는 삶은 수많은 생의 원인이자 결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도 나 자신도 당신도 그 수많은 생 중의 하나를 살고 있을 뿐인데, 누군가는 오늘도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총기난사를, 자살폭탄을 계획하고, 누군가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러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갑니다.
아- 인간은 얼마나 선하며 동시에 얼마나 악한 것일까? 어쩌면 살아있다는 건 그저 따뜻함의 기억일지 모릅니다. 약속 시간까지의 비어있는 공백, 도착지를 향한 비행기가 떠나기까지의 기다림, 그동안에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잔, 이곳에서는 잊은 지 오랜 화장실 세면대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물,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먼 나라의 노래, 오늘이라는 장소는 그냥 우연히 지나치는 게 아니라 어딘가를 향해가는 가운데 꼭 들러야만 하는 필연의 장소 같은 아스라한 비현실적인 느낌, 설레고 기대되면서도 동시에 묵직한 느낌의 불안을 동반하는 모든 시작, 아주 추운 날 두꺼운 외투를 껴입고 거리를 걷는 살아있다는 그 따뜻한 느낌,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모든 것이 끝났다. 실낱같은 희망도 여기까지다.”하는 패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의 가슴 떨리게 실감나는 ‘끝’에 관한 정의. 산다는 건 그저 그 끝에 도달하기까지의 하염없는 반복, 무의미 속에 숨은 ‘꽃’ 같은 의미를 찾아내기, 당신에게 쓰는 이 끝나지 않을 나의 편지처럼. 오늘도 나는 가상현실 ‘바그다드 카페’에서 당신의 손을 꼬옥 잡아봅니다. 참 따뜻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