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장마가 오면 책이 습해지는 걸 막기 위해 하루 종일 제습기를 틀어놓는다. 엄청난 양의 물이 제습기의 저장용기에 고이는 걸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든다. 도대체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양의 눈물이 있는 걸까? 겨울엔 그 많은 양의 물이 두껍게 얼어붙겠지. 마음도 그러하다. 어느 다큐영화에서 본 이런 구절이 생각난다. “나의 눈물을 모아 식물에 물을 주자.”
아버지는 평생 사 모은 수없이 많은 책을 남기고 가셨다. 아날로그적 유물인 이 오래된 책의 상업적 가치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내가 죽고 또 다른 세대들이 계속 죽고 나면 이 책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름 없는 시인인 내가 쓴 시들은 또 어떻게 될까? 아버지가 남긴 책 외에도 재산이라고 생각해도 좋을지 모를 그림들이 책방 창고에 가득 쌓여있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삼촌의 그림들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없었기에 그 그림들은 고스란히 나와 동생에게 삼촌의 유산 혹은 짐으로 남아 있다. 경매에 내다 팔아볼 생각으로 경매회사에서 일하는 친구 놈한테 부탁을 해봤지만 무명 화가라 받아주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수많은 책과 수많은 그림을 소유한 나홀로 부자가 되었다. 시간에 관한 최고의 철학자인 프루스트라면 이런 종류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어쩌다 눈에 띄는, 길가에 어지럽게 놓여있는 낡은 장식장, 대형 거울과 식탁과 의자, 집안 소도구들… 한 생을 마감한 사람의 유품일지 모를 그 물건들은 또 다 어디로 갈까? 사람의 한 생보다 물건은 훨씬 오래 남는다.
쉰에 세상을 떠난 삼촌은 이름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친구들 사이에서 천재로 통했다. 세상 떠난 다음 해에 아버지는 삼촌의 그림들로 전시회를 열었다. 아버지의 기자 인맥으로 「별을 그린 화가 별로 떠나다」… 그런 식의 꽤 큰 기사들이 실리기도 했지만 삼촌은 다시 긴 무명의 세계 속에 묻혔다. 삼촌이 세상을 떠난 뒤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에 적힌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내가 화가로서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내 작품들이 남기를 바라는 건 최선을 다해 기른 자식들이 제몫을 하고 살길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에 다름 아니다. 예술가는 성공해야만 죽은 뒤까지 자신이 만든 작품들이 쓰레기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의 존재들이다. 동시에 창조라는 기쁨을 지닌 드물게 행복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삼촌의 일기는 몇날 며칠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는 내다 버릴 수 없는 그림들이여! 도대체 지구의 수명은 얼마나 남은 것이냐? 지난 시간보다는 많이 짧은 시간일지 모른다. 다른 고대 동물들이 멸종한 것처럼 인간이라는 종도 멸종 가능하다고 과학자들은 예언하고 있으니까. 사실 지구가 어느 먼 미래에 멸망한다면, 유명작가든 무명작가든 별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저 행복하게 잘 지내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다. 비싼 가치를 지닌 상품과 쓰레기 사이에도 별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힘을 빼고 행복하게 시를 쓰는 거다.
하지만 행복한 자가 시를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남들에게 보이는 쇼윈도 행복과 달리 스스로 느끼는 행복은 절대 주관이다. 아버지가 남긴 오래된 책들과 삼촌의 그림들과 내가 쓴 시들 중 그 어느 하나라도 운이 맞아떨어져, 상상도 할 수 없는 막대한 자산가치가 되는 꿈을 오늘도 버리지 않기로 한다. 이건 희망이거나 망상이 아니라 그냥 취미다. 어쩌면 진짜 좋은 시는 작가미상이다. 우리는 기록할 뿐이고, 나머지는 신의 의지다. 이것도 내가 하는 소린지 어디서 들은 소린지조차 구분이 안 간다.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그들의 생각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고 그들의 삶은 모방이고 그들의 열정은 인용이다.”
쿼런틴 시대에도 시간은 단 일분도 정지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시간의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베를린에서 만난 내 첫사랑을 빼닮은 얼음 위의 발레리나, 그녀를 보러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갔었지만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녀의 기억은 오래전에 지구를 떠난 내 첫사랑과 맞물려 내 머리 속의 작은 방 하나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기적처럼 우리 책방에 들어선 건 베를린 거리의 야외 스케이트장에서 그녀가 번개가 치듯 빠르게 내 눈에 들어왔다 사라진 뒤 한 삼 년은 지난 어느 모호한 계절의 한낮이었다.
그녀는 어눌한 한국어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국어 번역판이 있는지 물었다. 한국 영화를 좋아해서 한국 유학을 왔다가 코로나로 발이 묶였다 했다. 동양적인 얼굴이 섞인 그녀를 가까이 보니 내 첫사랑 그녀가 어른이 된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듯 했다. 어쩌면 내가 빙판 위에서 본 그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긴 현실과 꿈과 영화와 끝없이 이어지는 넷플릭스 드라마의 장면이 구분이 안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한국적이고 프랑스적이며 독일적이기도 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길을 가다가 ‘시간 책방’이라는 이름이 맘에 들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문득 물었다. 혹시 피겨 스케이팅을 좋아하냐고. 그녀는 깜짝 놀란 듯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어릴 적 피겨 스케이팅 선수였다며, 지금도 프로는 아니지만 혼자서 얼음 위에서 춤추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얼음 위에서 영원히 춤을 추는 건 이루지 못한 그녀의 꿈이라고도 했다.
실제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지막 권 「되찾은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1999년에 칠레·프랑스·포르투갈 합작으로 영화화되었다. 임종을 앞둔 마르셀 프루스트는 옛 사진들을 보며 지난 인생을 되돌아본다. 하긴 잃어버린 시간들은 어느 나라에나 어느 시대에나 어느 누구나의 머릿속에나 압축이미지들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를 어눌하게 조금 하는 그녀와 영어를 어눌하게 조금 하는 나는 대충 영어 구십 프로에 한국어 십 프로로 이야기하는 친구가 되었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을까? 어쩌면 사랑은 천천히 싹트는 게 좋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섹스를 꿈꾸었을까?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마치 집안의 기능이 우수한 냉장고나 튼튼한 책장처럼 아내는 그저 내 옆에 있는 존재이다. 나는 가끔 아내와 섹스를 한다. 오래된 관계에서의 섹스는 섹스로 통용되는 단어가 갖는 자유와 설렘과 두려움을 상실한다. 마치 호흡이 잘 맞는 상대와 탁구나 배드민턴을 치는 것처럼 오랜 습관이 된 두 사람의 섹스가 가능하다면, 사실 그것처럼 안전하고 포근하고 좋은 것도 없다. 많이 늙을 때까지 그런 상태를 공유하는 부부라면, 더 이상 사랑하는 사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지구상의 그런 커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육체적 운동이 아니라 정신적 운동이라도 호흡이 맞는다면, 그들은 외로움이란 절대무적을 물리친 행운아들이다. 아내와 함께 있을 때, 내가 외로움이라는 천하무적을 물리친 기억은 없다. 넷플릭스 영화를 보다가 이런 독백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마치 내가 하는 말처럼 들렸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대충 이런 말이었다. “매일 집에 돌아온다. 달에 착륙하는 기분으로. 아내 혹은 아내 형상을 한 외로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든 아니든 매순간 늙어간다. 그리고 죽을 것이다.”
‘아내 형상을 한 외로움’, 이처럼 정확한 말의 조합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인위적으로 떠올리는 늙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첫사랑, 그녀를 닮은 ‘이다’, 나는 그 둘을 합친 이미지를 통해 천하무적 외로움을 때려눕히려는 것일까? 그녀는 어눌한 한국어로 때로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나에게 주고 행복은 당신이 가져요.” 역시 어디선가 들은 말 같다. 하도 영화를 많이 봐서 내 생각인지 남의 생각인지 구분이 안 갈 때가 많다. 이를테면 “시간은 네 모든 열정을 다 합한 것보다 힘이 세다.”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도는 이 문장이 내 머릿속에서 나온 건지 내 맘 같아 적어놓은 영화 속의 대사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영화나 드라마 속에는 불륜의 내용이 많기도 하다. 불륜을 주제로 한 드라마들을 볼 때 인류란 참 귀여운 피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자기들끼리 정해놓은 삶의 규칙에 따라 불륜이라는 부정한 단어를 만들어냈다. 남들 모르게 둘이서 하는 사랑, 불륜이란 가슴 두근거리는 감정의 유희 혹은 몰입, 불안과 절망과 행복과 쓸쓸함 사이의 간주곡쯤으로 해두자. 하지만 지금은 그저 쓸데없는 감정과 시간의 낭비일 뿐, 나이 들어 편안해서 다행이라는 그런 시점에 ‘이다’가 책방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이다. 전화를 걸어서 ‘이다’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전화하지 않는다. 그녀의 전화를 기다린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걷는다.
비가 오기 시작한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앞서가는 두 사람의 대화를 어쩌다 엿들을 때, 하필이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헤어져요,” 뭐 그런 내용일 때, 마치 영화 속 같은 그런 비 오는 날의 풍경은 왠지 영어로 들어야 실감이 날 것 같다. “I don't love you anymore.”
언젠가 그런 말을 엿들은 기억이 있다. 뉴욕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 맨해튼 34번가 메이시 백화점 앞에서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커플 중 여자가 갑자기 총을 쏘듯 내던진 단말마의 비명 같은 소리, 그게 바로 “I don’t love you anymore.”였다. 그런데 그 문장이 이십년이 지난 지금, 마치 내가 직접 들은 것처럼 내가 마치 총에 맞은 것처럼 아직까지도 기억 속에 사무치게 남아있는 것이다. 어쩌면 간접경험이 직접경험보다 더 강렬하게 남을지도 모른다. 잊고 싶은 자신의 기억은 깊숙이 숨겨두고 훔쳐본 남의 기억만 자꾸 들추는 건지도. “I hate you.”보다 훨씬 슬픈 문장, “I don’t love you anymore.” 이 말은 다시 하지도 듣지도 말 일이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신이시여. 오늘도 별처럼 빛나는 불륜을 꿈꾸며, 지구 호텔에서 편안히 머물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