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딸 아이 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바로 그 음악회에서였다. 크지 않은 키, 다부진 어깨에 늘 웃는 얼굴의 남자가 음
악회 중간 휴식 시간에 와인 한잔을 들고 오던 그녀와 부딪쳐 하얀 원피스에 붉은 와인을 흠뻑 쏟았다. 종업원 두 명이 달려와 서둘러 옷을 닦아주었지만 붉은 얼룩은 그대로 남았다. 죄송하다고 거듭 말하는 남자를 그녀는 다음 날 아침 뉴스 화면에서 보았다. 기업인들과 정치가들의 무슨 기념일 행사 같은 장면이었다. 와인을 쏟은 날 비서라는 사람이 와서 전화번호를 물었고, 그런 인연으로 그녀는 그곳에서 플루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총명한 눈빛에 가녀린 몸매와 낮고 정숙한 목소리, 음악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그때 그녀의 모습을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어떤 우연들이 사람들의 운명을 연결하고, 그 연결의 파장은 때로 한 사람의 운명을 아주 다른 방향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때로는 낭떠러지 같은 곳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내가 그녀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내 눈앞에 그녀의 삶의 결정적 순간들이 현실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영안실을 나서는 길에 주인의 보조를 맞추며 빠르게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며 문득 한참 때의 아름다운 그녀가 떠올랐다.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모르는 처절한 그녀가. 저 끈을 놓아버리면 강아지는 어떻게 살까?
그녀가 그랬다. 사랑하던 그 남자가 손을 놓아버리자 세상을 연결하는 끈이 탁 하고 끊어졌다.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드문 사람들이 있다. 그 뒤로 혼자 아이를 낳고 오랜 세월을 세상의 망상의 목소리에 시달리다가 너무 이르게 세상을 떠났다. 정보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둥, 방송사에서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는 둥 실제로 그 망상의 마음의 풍경은 유일한 취미이던 그림 속에 그대로 나타났다. 실제로 그녀를 위로한 건 플루트보다 그림이었다. 나를 위로한 건 그림보다 영화였듯이.
넷플릭스에 접속한 뒤로 나는 밤새 세 편의 영화를 보기도 했다. 본 영화를 또 볼 필요는 없었다. 넷플릭스는 영화의 바다였고, 외로움도 심심함도 없애주는 보물섬이었다. 오래전 영화를 다시 보듯 나는 그녀와의 만남의 순간들을 돌이켜보았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그 느낌도 많이 달랐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리라.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거나 잊힌 장면들처럼 그녀의 오래된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하긴 그녀뿐 아니라 50억 년 뒤엔 저 태양도 사라진다. 우리의 교만도 걱정도 불행도 다 사라진다.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전쟁터에 참가한 전우들이다. 누가 먼저 죽는지는 정말 간만의 차이다.
도대체 이렇게 당연하고 지루한 생각들이 나의 때늦은 슬픔에 도움이 되는 걸까? 나는 카페로 돌아와 취하도록 와인을 마셨다. 마침 손님은 한 명도 없었고, 잠시 까무룩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남자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집에도 회사에도 아무 데도 없는 남자를 찾아 지구 끝까지 가리라 맹세했다. 세상의 모든 호텔들을 다 뒤질 작정이었다. 드디어 사람을 사서 그가 숙박하고 있는 호텔을 찾았다. 그 위대한 동시에 구린내 나는, 돈밖에 없는 그가 침대 속에서 웬 젊은 여자와 뒹굴고 있었다. 돈밖에 없는 놈이 돈도 안 쓰는 돼지 같은 놈이라고 하기엔 돼지는 너무 착하고 순수하고 위생적이며 희생적이다. 나는 돼지 같은 그놈의 배를 숨겨가지고 갔던 칼로 깊숙이 찔렀다. 낭자한 피를 보며 젊은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도 아마 곧 이 사람을 죽이고 싶어질 거라고.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녀는 안 그래도 그를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놈을 힘을 합해 차에 실어 먼바다에 갖다버렸다. 시체가 떠오른다 해도 하도 용의주도하게 처리해서 완전범죄가 되고도 남을 터였다.
아니 어쩌면 다 꿈일지 모른다. 그녀의 존재도, 그녀가 죽은 것도, 내가 돼지 대표를 죽인 것도, 아니 지금 내가 존재하는 것도. 때는 1899년이거나 2019년 어느 가을 저녁이었다.
꿈은 때로 계속되기도 한다. 내가 다시 영안실로 찾아가 “내가 대신 그놈을 죽였어. 너 안 죽었지? 벌떡 일어나.” 그러자 영안실 그녀의 사진 속에서 그녀가 천천히 살아 걸어 나왔다. 그녀가 “친구야. 나 안 죽었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영안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가자. 은하수를 넘어 화성 목성 해왕성으로.” 그녀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사랑해. 영원히.”
그녀의 ‘영원’이라는 말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나는 다른 꿈의 무대에 섰다. 마치 넷플릭스 영화 한 편이 끝나자마자 다른 영화가 시작되는 것과도 비슷했다. 카페 프루스트 문을 열고 내가 죽인 돼지 대표가 들어왔다. 그가 스탠드바의 내 앞에 앉아 제일 비싼 와인 한 병을 주문했고, 외로워 보인다며 내가 같이 한 병 두 병 세 병을 비울 때쯤 그가 말했다. 고맙다고 나를 죽여줘서 고맙다고. 실은 너무 괴로워서 같이 죽을 여자를 돈 주고 산 거라고. 같이 죽는 척만 하다가 내가 죽으면 경찰에 연락하라 했던 거라고. 당신만 플루트를 그렇게 애달프고 아름답게 연주하는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라, 나도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고. 그녀가 가냘픈 어깨가 드러나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플루트를 연주하는 장면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나는 처음으로 돼지 대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선한 얼굴이었다. 내가 그를 죽인 게 정말 꿈이면 싶었다. 어떤 게 꿈이든 상관없었다. 어느 스님의 법문처럼 열심히 구하다가 후회하며 사라지는 게 인생이니까.
그때였다. 죽은 줄 알았던 그녀가 거짓말처럼 카페 프루스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그때 분명히 보았다. 꿈인지 생신지 카페 프루스트의 하얀 벽에 그림 한 점이 걸려있는 것을. 그건 그녀와 나, 그리고 돼지 대표, 우리 세 사람이 다정하게 와인을 마시는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