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당신에게서 소식이 없어 궁금합니다. 잠 안 오는 밤에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이라 한다’는 불교 경전의 구절을 곱씹다가 읽으려다 덮어둔 보르헤스의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고로 나는 죽을 것이다’라는 구절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문득 뉴스에서 본 퓨마를 생각합니다. 동물원의 열린 문으로 탈출을 시도한 퓨마가 네 시간 반 동안의 대탈주 끝에 사살되었다는 내용이었어요. 마취 총을 맞고도 죽지 않은 퓨마는 커다란 종이 상자 안에 숨어있었다는데, 퓨마를 발견한 사람들이 위협을 느껴 결국 사살했다 하네요.
서울의 동물원에서 태어나 두 마리 새끼를 낳은, 텔레비전에 비친 잘생긴 암컷 퓨마는 대전의 동물원으로 옮겨온 지 오 년이 되었다 해요. 네 시간 동안의 사투는 자신이 태어난 서울의 동물원으로, 아니 자신도 모르게 먼 고향 원시의 숲으로 가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니 그저 길을 잃은 건지도. 가슴이 먹먹해져 오네요. 뉴스를 보니 동물원이라는 잔인한 인류의 상징이 더 이상 유효한가에 대해 사람들은 반론을 제기하고 있었어요. 국제 멸종위기인 퓨마의 죽음을 애도하며, 언젠가 기르던 개 한 마리가 떠오릅니다. 기르는 일이 힘들게 되어 훈련소에 장기 투숙시켜 온 애견을 오랜만에 찾아가 짧은 상봉을 한 지 이틀 만에 사망한, 사랑하던 개의 기억이 겹쳐집니다. 산다는 건 이렇게 먹먹함의 연속입니다. 사살된 퓨마는 교육용 박제로 만든다고 하네요. 동물에게나 사람에게나 인간은 늘 잔인합니다. 엉뚱하게도 얼마 전 텔레비전 다큐 프로그램에서 본, 이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에게 생체실험을 가했던 의사들이 떠오릅니다. 자신은 가능한 한 실험대상 환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가장 피해가 덜 가는 실험을 했다는 한 의사의 고백이 인상적이었어요.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지만, 그렇게라도 실험대상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방법이라는 건 어떤 것이었을까요? 문득 며칠 전 시위를 하다가 이스라엘군에 사살당한 팔레스타인 십대 소년의 얼굴이 사살당한 퓨마의 얼굴에 겹쳐지네요.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의 탈출 이야기는 늘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뭐가 다를까요? 며칠 전엔 텔레비전에서 필리핀의 ‘이와힉’ 교도소 안의 풍경을 보았습니다. 죄수들이 가족과 함께 살기도 하는, 병원도 학교도 노점상도 있는 거대한 개방형 교도소인 그곳은 요즘 관광코스로도 유명하다 합니다. 혼인빙자간음으로 27년째 복역 중인 사람, 애인의 아버지로부터 성폭행 범으로 고소되어 이십 년 넘게 살고 있는 사람, 소년으로 들어와 청년이 된 사람, 청년으로 들어와 노년이 된 사람들로, 그곳은 마치 인간 동물원을 상상하게 했어요. 젊어서 들어와 늙어서 죽은 누군가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망 알멜도는 악하지 않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곳에서 몇 십 년씩 갇혀 사는 사람들과 동물원의 동물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새가 되고 싶은 죄수들은 바깥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착하게 살고 있었어요.
오늘은 길을 건너다가 신호등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신호등의 파란불 여러 개가 다 켜져 있었어요. 그 불이 깜박이다가 서서히 하나씩 꺼져갔어요. 하나 둘 셋 차례로 꺼지는 파란 불을 바라보며 길을 건넜어요. 삶도 신호등 같아서 깜빡깜빡하다가 파란불이 다 꺼지고 빨간불이 들어오면 끝인 거죠. 불이 다 꺼지기 전에 사뿐히 길을 건너며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요. 오늘따라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실감이 났답니다. 신호등은 내게 늘 삶을,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깜빡이는 찰나의 생을 위해 건배하고 싶네요.
때로 나는 세상의 모든 전쟁이 스포츠 경기로 대체되는 세상을 꿈꿉니다. 디지털 전쟁은 디지털 게임으로 대체되고 아날로그 전쟁은 스포츠경기로 대체되는 전쟁 없는 미래를 상상합니다. 문득 중력의 법칙을 거스른 채 인물들이 둥둥 떠다니는 샤갈의 환상적인 그림이 떠오릅니다. 어릴 적 화집에서 처음 본 샤갈의 그림은 내 영혼에 깊은 인상을 남겼답니다. 짙푸른 색깔을 배경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연인의 이미지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어요. 이 고달픈 세상을 꿈꾸듯 왜곡시킨 샤갈의 그림은 내 사춘기 시절의 감금된 수업시간을 자유로운 하늘로 만들어버린 마법의 그림이었죠. 샤갈의 그림을 흉내 내던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은 드물게 행복한 시간들로 이어졌답니다. 염소도 서커스 하는 남자도 새보다 높게 나는 사람들도 그래서 새가 되어버린 사람들도 따라 그릴수록 샤갈의 그림은 “더 높이 날아도 돼.” 하는 것만 같았어요. 어른이 되어 프랑스 니스의 샤갈미술관을 찾았던 게 엊그제 같네요. 온 눈에 햇살이 스며들 듯 환하던 스테인드글라스 그림들을 본 기억이 아련합니다. 핍박받고 떠도는 유대인으로 1·2차 세계대전을 살아낸 샤갈은 비극의 시대를 깊고 눈부신 색채와 슬픔과 기쁨과 사랑과 향수를 담은 독창적인 휴머니즘으로 승화시켰죠. 하긴 비극의 시대가 아닌 적이 있었을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의 시대의 연속인걸요. 샤갈의 그림 속 인물들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이유를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하고 공중에서 떠도는 사람들, 조국을 잃고 방랑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이미지에 요즘의 범지구적인 코드인 난민의 이미지가 겹쳐옵니다. 샤갈은 예술과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색은 오직 하나, 그것은 사랑의 색이라고 말했어요. 그 부유하는 삶에 안정과 평화를 선물했던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 벨라, 그녀가 떠난 시간들은 슬픔과 절망을 극복한 사랑의 연금술로 영원히 남았죠.
백 년을 살다간 샤갈의 삶과 사랑에 끝없는 존경을 보내며, 나는 엉뚱하게도 디아스포라 팔레스타인인들의 방랑을 생각합니다. 이천 년의 터전을 되찾은 유대인들과 다시 이천 년의 터전을 빼앗기고 방황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슬픔을 그림으로 그려봅니다. 알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치는 걸 영광스러운 삶과 죽음으로 생각하는 팔레스타인 소년들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문득 제가 살던 동네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를 무너뜨린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수장이던 오사마 빈 라덴의 얼굴도 떠오르네요. 1957년 사우디아라비아 남서부의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급진이슬람주의자 되어 국제테러조직인 알카에다의 우두머리가 된 그는 그의 어머니 말에 의하면 어린 시절 수줍음을 많이 탔지만 학문에 열정적인 아이였다고 하네요. 20대 초반 대학에 들어가면서 이슬람 성전주의자로 변했다고도 했어요. 어머니는 여전히 빈 라덴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답니다. 하긴 팔레스타인인의 눈으로 볼 때 오랜 은둔 생활 중 쥐도 새도 모르게 미군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 오사마 빈 라덴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위대한 성전의 영웅이겠지요. 예술과 테러는 어쩌면 동전의 양면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방 한가운데의 공중에서 연인이 둥둥 떠오른 현실 초월적인 샤갈의 그림이 다시 떠오릅니다.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세상 어디로나 날아갈 것만 같은 달콤한 사랑의 도피, 그 안에 깃든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슬픔과 먹먹함도 함께 떠오릅니다.
꽃다발이야말로 사랑하는 연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샤갈의 말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그건 꽃이 살아있는 것들의 가장 살아있는 상징이기 때문이죠. 산책, 생일, 선물 등의 제목이 붙여진, 도시의 지붕 위로 날아오르는 두 남녀의 이미지는 살아있음에 관한 우수 어린 오마주입니다. “내가 창문을 열면 아내 벨라가 푸른 공기, 사랑, 꽃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벨라는 오랫동안 캔버스 위를 떠다니며 나의 예술을 인도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 자신의 길을 인도하는 환상을 지닌 예술가는 행복합니다. 하긴 나 자신도 어느 날 다 그린 그림 앞에서 ‘이걸 도대체 누가 그렸다는 말인가?’ 하는 신기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자주 들 땐 참 행복합니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작은 드로잉 아래쪽 오른편 구석에 샤갈은 연필로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나 여기 있어. 네 생각 날 때면 나한테 미안해 해”라고. 우리는 나 자신에 관해 생각날 때가 얼마나 될까요? 나한테 미안할 때가 분명 있을 테지요. 당신은 어느 때 자신에게 미안한가요?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 나에게 미안합니다. 뉴욕에 살던 시절, 일주일 이상 밖에도 나가지 않고 그림을 그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고독했던 시절인지도 모르겠네요. 이제 그 그리운 시절을 다시 갖고 싶은 열망이 내 마음속에 넘쳐납니다. 그림만 그리면서 사는 단조로운 삶이란 생각보다 행복했습니다. 세상은 그때로부터 너무 많이 바뀌어 이제 인공지능이 그린 초상화가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미술 전공자가 아닌 프랑스 청년 세 명이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그린 이 초상화는 14세기부터 20세기에 그려진 초상화 일만 오천 점을 컴퓨터에 입력시켜 방대한 과거 초상화들을 학습해 독창적인 초상화를 스스로 그려낸다 하네요.
이거야말로 제가 늘 꿈꾸는 진정한 의미의 마술이지요. 마치 마술이 속임수가 아니라 그 모든 괘를 다 외워야 하는 엄밀하게 계산된 노력의 소산인 것처럼.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는 인공지능을 탄생시킨 대단한 그들은 이것은 19세기 사진이 등장했을 때처럼 새로운 예술 분야가 탄생한 것이라고 말하네요. 기존의 예술가들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예술 영역이 탄생한 거라고요. 당신은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초를 다투는 수술을 할 때 가장 행복하겠죠? 이미 인공지능이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는 의술이야말로 사람의 손이 일으켰던 모든 실수들을 입력시켜 완벽한 인공지능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오지는 않을까요? 외과 의사가 필요 없어지는 세상 말이죠. 우리가 살아있는 날까지는 우리의 손이 참으로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주었다는 삶에 대한 소감을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실은 당신이 오래 소식이 없어 불안한 마음에 이렇게 긴 편지가 되었답니다. 며칠 전엔 카불의 스포츠클럽에서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나 스무 명이 사망하고 칠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무사하리라 믿으며, 내일도 무사하게 눈을 뜨는 아침을 기도합니다. 활짝 핀 꽃다발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함께 전합니다.
─ 당신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