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 2
도넛을 좋아하세요? 엘비스 프레슬리가 도넛 중독이었다는 걸 아세요?
도넛에 중독된다는 건 경험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술도 담배도 코카인도 필로폰도 아니고, 하필이면 도넛 중독이라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네요. 그때도 그녀는 도넛을 좋아했어요. 도넛 가게가 그냥 동네 빵집이 아니라 전문적인 체인스토어로 대한민국에 자리 잡기 시작했던 그때, 그녀는 그 자리에서 한 상자를 다 먹어치우곤 했죠. 그런데도 그녀는 살이 찌지 않았어요. 그게 병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녀를 만난 지 한 일 년 남짓 되었을 때죠.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준, 모양은 엉망이지만 그 따끈함이 먼저 떠오르는 도넛이 생각나요. 그 위에 뿌려진 설탕의 서걱거림도 떠오르고요. 그녀가 도넛을 집어들 때는 그 눈빛이 유난히 반짝거렸어요. 도넛 한 개 도넛 두 개 도넛 세 개, 아무리 먹어도 더욱 허기가 지는 것처럼 보이던 내 사랑 그녀. “인생은 도넛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그게 누구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네요. 아니면 바로 그녀였을지도.
그녀의 동생이 제게 전화를 걸어온 건 그녀로부터 소식이 끊긴 지 한 달째 되었을 때였어요. 제가 전화를 받고 달려간 곳은 대학병원 정신병동이었어요. 그녀는 진정제를 맞은 탓인지 눈이 완전히 풀려 있었어요. 그녀는 저를 보자마자 아주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지금 네가 보는 나는 내가 아니야. 그걸 넌 알지?” 그래서 저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얘기지만 그녀는 어릴 적부터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 없이 자라 무거운 물건이라곤 첼로밖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부잣집 딸내미였어요.
이런 게 운명일까요? 첼로 켜는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겠다 했었는데, 첼로를 켜는 여자와 또 사랑에 빠지다니요. 그것도 우울증이 심한 도넛 중독환자와요. 그녀가 첼로를 켜는 모습을 보면 숨이 막혔어요. 그런 그녀가 왜 방 안에 틀어박혀 나가지도 않고 도넛을 한 상자씩 먹어치우는지 정말 알 수 없었죠.
“밖에 나가서 아무도 몰래 도넛 한 상자만 사다 줄래?” 그녀는 애절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어요. 요즘 같으면 ‘도넛 플래닛’이라는 가게에 가서 가지각색의 맛과 모양을 지닌 도넛을 잔뜩 사다 줄 텐데 그때만 해도 도넛의 종류가 몇 개 되지 않았죠. 어쨌든 저는 아무도 모르게 밖에 나가 도넛 한 상자를 사서 그녀에게 가져다주었어요. 도넛을 보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그녀는 허겁지겁 도넛 한 상자를 다 먹어치우기 시작했어요. 대신 저는 그녀의 저녁 식사인 병원음식을 대신 먹어치웠죠. 미역국과 멸치볶음과 계란 프라이 같은 메뉴였지만, 어찌나 맛이 있었던지 저는 아직도 그 미역국의 맛을 잊지 못한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저는 면회를 갔어요. 매일 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식구들이 매일 와 있는 터라 저는 아무도 없는 때를 틈타 도넛을 사가곤 했지요. 날씬하던 그녀는 점점 살이 찌기 시작했어요.
“도넛에 왜 구멍이 뚫려 있는지 알아?” 하고 그녀는 물었어요.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그녀는 이어서 말했어요. “그건 존재의 구멍이야. 오래전 미국 남서부 어딘가에서 고고학자들이 선사시대 인디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있는 튀김과자 화석을 발견했대. 그러니까 도넛은 선사시대 때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빵의 일종이지. 빵을 튀길 때 가운데가 잘 익지 않아 아마 구멍을 뚫어서 전체가 고르게 익을 수 있게끔 만든 게 도넛일 거야. 그 구멍이 없었다면 아니 도넛이 없었다면 나는 살아갈 재미가 없었을 거야. 그 존재의 구멍 사이로 나라는 존재가 희미하게나마 보이거든. 답답해. 숨이 막힐 것 같아.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도망쳐주지 않을래?”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제가 사간 도넛 한 상자를 뚝딱 먹어치웠어요. 밥을 잘 먹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 살이 찌는지 아는 사람은 그녀와 저밖에는 없었죠. 살이 찐 그녀가 연주하는 첼로 소리에는 더욱 풍성한 윤기가 흘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