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북조선에 온 무렵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시기에 몇 백만 명이 굶어 죽어갔지만, 평양에 사는 우리 집은 배고프지 않고 살 만했어요. 증조부 할아버지가 이현상 어른의 가족을 업고 월북한 분으로 자랑스러운 가문이라는 걸 코에 걸지 않더라도 먹고사는 데는 아무 걱정 없었지요. 적어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체 게바라가 그려진 쿠바산 부채를 제 손에 쥐어주며 주체사상탑 앞에서 8시에 만나자던 당신의 약속을 못 지킨 이래 제 가슴은 파랗게 멍이 들었지요. 멍은 가슴에만 드는 게 아니라서 체, 당신 꿈을 꾸고 나면 온 몸에 노랗게 멍이 들었어요. 어떤 날은 빨갛게 노을빛 멍이 들었지요. 세상의 갖가지 상처나 그 상처가 만드는 멍들은 너무나 다양해서 무지개 색깔보다 훨씬 다양한 멍들을 만들어요. 그 상처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수많은 멍들을.
이 세상의 셀 수 없는 멍들을 생각해요.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와 중조할머니와 얼굴 모르는 수없는 어머니들의 푸르다 못해 노랗다가 빨간 노을로 타오르다가 하얀 이슬로 맺힌 상처의 고고학, 제 가슴인들 그보다 못하려고요. 사춘기 시절 어머니가 들려주신 김기림 시인의 시구가 떠오르네요. 어머니는 할머니가 들려주었던 그 잊을 수 없는 시구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셨어요.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떼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 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또 이런 시도 기억이 나네요.
‘이십 대에는 성히 욕망하고 추구하다가도 삼십 대만 잡아서면 사람들은 더욱 성하게 단념해야 하나보다. 학문을 단념하고 연애를 단념하고 새로운 것을 단념하고 발명을 단념하고 드디어는 착한 사람이고자 하던 일까지 단념해야 한다. 삼십이 넘어갖고도 시인이라는 것은 망나니라는 말과 같다고 한 누구의 말은 어쩌면 그렇게도 찬란한 명구냐.’ 그러고 보니 저도 상처투성이 한 많은 시인이었네요. 아- 김기림, 제가 태어나 들어본 가장 처음의 아름다운 시, 김일성 수령님과 김정일 지도자 동지에 관한 그 아우라 넘치는 모든 구절들은 그에 비하면 정말 쓰레기 같았죠. 그때는 몰랐지만요. 그 아름다운 시구들 중에서도 정말 드디어는 착한 사람이고자 하던 일까지 단념하고만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제 이야기 같아서 지금도 눈물이 나네요. 갖은 역경을 헤치고 미국에 도착한 저는 매일 고된 청소 일을 하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쿠바라는 가까운 나라에 당신이 살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던 시절, 저는 주말마다 이민자 미혼모들을 위한 그림 강습 같은 프로그램에 가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어요. 북조선에서 그리던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을 그리지 않아도 되는 그 시간들은 행복했어요. 그림을 가르치던 프라이어 선생님은 뉴욕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 시에서 하는 이민자 미혼모들을 위한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맡아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그림을 가르쳐주시는 분이었어요. 제가 탈북을 해서 미국까지 건너온 북한 출신 미혼모라는 걸 안 다음부터 그는 저를 유독 친절하게 대해주었어요. 어느 날은 선생님이 맨해튼 42번가에서 공연하는 비싼 뮤지컬을 보여주기도 하셨죠. 그렇게 화려한 무대가 눈앞에 펼쳐지다니 저는 이게 꿈인지 생신지 구분할 수가 없었죠. 잘하지도 못하는 짧은 영어로 프라이어 선생님과 나누는 대화는 재미있었어요. 제가 아무리 잘 못 말해도 선생님은 옳게 알아들으셨거든요. 나이가 워낙 많으신 선생님은 저를 친딸처럼 대해주셨어요. 탈북을 겪으며 참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많이 만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딸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선생님께 저는 쿠바에 살고 있는 당신이라고 답했어요. 참 어이없는 일이죠. 선생님은 양미간을 보기 좋게 찡그리시며 당장 쿠바로 날아가서 딸 아이 아빠를 잡아오라 하셨어요. 그러더니 어느 해 제 생일 날에 정말 선생님은 아바나행 비행기 표를 저에게 쥐여 주시며 쿠바에 다녀오라 하셨어요. 산다는 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거라 하시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