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농구를 보러 가는 게 취미이다.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농구를 보러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거다. 늘 혼자 다니지만 가끔은 누군가와 같이 가고 싶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너는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다른 아이니까 친구 사귀는 게 어려울지 모른다. 언제나 사람을 조심하고 특히 남자를 조심해야 한다.” 나는 사실 내가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른지 잘 모른다. 나는 말도 잘하고 슈퍼에 가서 계산도 잘하고 어느 날은 집에 들어 온 도둑도 잡았다. 우리 아파트는 한 동 밖에 없어서 어느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처럼 빠삭하게 아는 사람도 없다. 고급 공무원이었던 우리 아버지와 엄마와 나, 세 식구는 삼십여 년째 이 집에 살고 있다. 우리 집은 군사 정부 시절에 아주 튼튼하게 잘 지어진 아파트라 지진이 나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도 나는 늘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진이 나서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집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동물들이 지진이나 홍수가 나는 걸 사람들보다 먼저 알고 대피하듯이 나는 자연재해의 낌새를 맡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릴 적부터 내가 비가 올 거라 하면 영락없이 비가 왔고, 눈이 온다 하면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우리 아파트 사람들이 현관 앞에서 내가 우산을 들고 있는 걸 보면 다시 집으로 올라가서 우산을 갖고 내려오기 일쑤다. 내 얼굴을 보면 “오늘 비가 올까?” 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이 아파트에 부자들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는 걸 8층 언니가 알려주었다. 돈을 금고에 가득 쌓아두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빚이 많아 관리비도 못 내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전기난로를 틀어놓고 사는 사람도 있다고. 알고 보니 그게 바로 8층 언니네 가족이었다. 나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오래도록 친하게 지낸 그 8층 언니가 적지 않은 돈을 내게 꾸어서는 이사를 간 뒤 소식을 딱 끊은 이후부터다. 돈 잃고 친구도 잃는다는 소리가 뭔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녀와 친해진 건 나와 농구장을 같이 갔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한테 친절하게 구는 사람을 조심해라. 뭘 주면 받지 마라. 어디 가자면 따라 가지 마라.” 했던 이유를 알게 된 것도 그 언니 때문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외로운 나에게, 그녀는 선뜻 농구장을 같이 가주었고 라면도 사주고 색깔이 예쁜 마카롱도 사주었다. 내가 농구공을 처음 준 것도 그녀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네가 나를 좋아하는구나. 나도 네가 참 좋아.” 했었다. 그녀 이후 내가 농구를 보러 갈 때 누군가와 같이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같이 농구를 보러 가고 싶은 사람은 우리 아파트 13층에 사는 프루스트 씨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얼굴을 아는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다들 그를 프루스트 씨라고 부른다. 나는 혹시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를 만날까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남자에 대한 호칭이 왜 아버지와 아저씨와 오빠밖에 없는지 아쉬울 때가 있다. 아니, 선생님도 있고 사장님 회장님도 있긴 하다. 나는 그냥 그를 줄여서 p씨라고 부르기로 한다. p씨는 보통 사람과 달라 보인다. 그냥 바람 같기도 하고 공기 같기도 하고 꽃씨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하다. 그래서 보통 9층이나 12층 아저씨 아줌마로 부르기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이 아파트에서 그가 프루스트 씨로 불리는 이유는 누군가 신기한 듯 잔뜩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름과 직업을 물을 때마다 프루스트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한다. 밖에도 안 나가고 그냥 하루 종일 시계만 들여다보며 노는 사람이라고. 나중에 알게 된 건데 프루스트는 시간을 연구해서 길고 긴, 끝나지 않는 책을 쓴 유명한 작가라고 했다. 사실 나는 시간이 뭔지도 잘 모른다. 시간보다는 농구가 좋고 가끔은 농구가 시간 같기도 하다. 농구를 보러 가면 농구장에서 농구공을 하나씩 나눠주기도 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주려고 농구공을 하나씩, 둘씩 내 방안에 모아둔다. 엄마가 들어와 공을 버리라 하면 나는 필사적으로 공을 지킨다. 두 번째로 농구공을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바로 p씨다. 그는 집에서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농구공을 줄 기회가 많지 않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 농구공을 주려고 매일 기다린다. 어느 날 나는 우리 집인 10층에서 13층까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가 드디어 그를 만나 불쑥 농구공을 내밀었다. 그는 마치 내 맘을 안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농구공을 받아들고는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내가 준 농구공을 마치 다이아몬드라도 되듯 소중하게 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나는 그에게 농구공을 두 개 더 주었다. 아마 크리스마스였거나 내 생일날이었던 것 같다. 줄 때마다 늘 처음 받는 것처럼 깜짝 놀란 듯 받으며 “이게 뭐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다. 어느 비 오는 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그는 나를 향해 동전이 가득 든 돼지 저금통을 내밀었다. “은행에 가서 지폐로 바꾸려 했는데, 나는 필요가 없어서요.” 놀라서 망설이는 내 손에 그는 묵직한 돼지 저금통을 쥐어주었다. 너무 뜻밖이라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도 까먹고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는 새 엘리베이터는 지상에 도달했고, 그는 내 앞에서 총총 사라졌다.
나는 지하 차고에다 농구공을 감춰두기도 한다. 집안에 너무 많이 쌓여 엄마가 내다 버릴까 걱정이 되어서다. 어느 날 저녁, 농구공을 숨겨두는 지하 차도 구석으로 가려는데 어디선가 낯선 웅얼거림이 들렸다. 텔레비전에서 본 것 같은 멧돼지 한 마리가 나를 멀뚱히 쳐다보며 인사라도 하는 듯 뭔가 말을 했고,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멧돼지의 말을 들었다. 그가 말하길 프루스트 씨를 만나러 왔다고, 그래서 너는 누구냐고 했더니 '시간'이라고 답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중, 경비 아저씨가 경찰 아저씨들을 불러 도망가는 멧돼지를 사살해 죽여 버렸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막 울면서 따지니까 경비 아저씨는 주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며 자기 아니면 내가 죽을 뻔한 걸 살려준 건지나 알라고 했다. 나는 그 멧돼지가 아무도 해하지 않으며 단지 프루스트 아저씨를 만나러 왔다고 하니, 기막히다는 듯 웃으며 가서 잠이나 자라 했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프루스트 씨, 시간이 찾아왔었어요.”라고 전해야 할 것 같아 그 집 앞을 서성댔지만 그는 한동안 집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집 도우미 아줌마 말에 의하면 그는 오후에는 대개 잠을 자기 때문에 깨우면 안 된다. 그래서 문을 두드리지도 못했다. 엄마랑 밥을 먹다가 텔레비전을 보니, 우리 아파트 지하 차고에서 만난 것과 똑같이 생긴 멧돼지들이 먹을 게 없어 시내로 내려왔다가 아파트 지하 차고에서 발견되어 총에 맞아 죽는 광경이 나왔다. 나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멧돼지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그를 만나기 위해서 왔다가 사살당했다는 걸 p씨에게 꼭 전하고 싶었다.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내 눈에는 돼지들만 보였다. 아프리카 열병인지 뭔지에 걸린 이유로 생매장당하는 셀 수도 없는 돼지들. 어제는 라디오에서 길을 건너다 줄줄이 차에 치여 죽은 새끼돼지들의 소식도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죽어가고 있다고 나는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불쌍한 멧돼지는 시간이었고, 진짜 멧돼지는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였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빨이 하나도 없다. 잇몸이 나빠서 임플란트를 할 수 없다고 의사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아주 부드러운 음식만 먹고 산다. 돼지고기도 쇠고기도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어느 날 늦게 농구를 보고는 공 하나를 받아서 콧노래를 부르며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는데, 멧돼지를 죽이는 데 공을 세운 그 새로 온 지 얼마 안 된 경비아저씨가 나를 보고 말했다. “아가야, 오늘 늦었네. 아저씨 무릎에 앉아 놀다 안 갈래?” 하는 거였다. 나는 내가 이빨이 없다고 나를 무시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뭐라구요? 아저씨?” 하는 순간 그가 바지를 내리고 자신의 징그러운 물건을 만져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너 오늘 죽어봐라.” 하면서 그 물건에다 농구공을 세게 던지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망쳤다. 머릿속에는 시간이라는 이름의 멧돼지와 프루스트 씨의 얼굴만 맴돌았다. 다음 날 내 말을 듣고 격분한 엄마가 경비 아저씨를 혼내주려고 내려갔는데, 그 뻔뻔한 경비가 자기 조카 중에도 정신지체 장애아가 있어서 남 같지 않아 놀다 가라 했을 뿐 나머지는 내가 다 거짓말을 하는 거라 했다며 엄마조차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이 억울한 마음을 어디다 풀어야 할지 몰라 프루스트 씨가 사는 13층에 올라가서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다. 도우미 아줌마가 나와서는 주인아저씨가 외국에 여행을 가서 오래도록 집에 없다고 했다. 그는 내가 모르는 사이 낯선 나라로 여행을 간 것이었다. 나는 외국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외국은커녕 부산도 대구도 가 본적이 없다. 나의 여행은 늘 농구장 가는 길이다. 문득 나는 산책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방 안에서 나오지 않거나 낯선 외국인지 아니면 낯선 혹성에 가 있는 그가 어쩌면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