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빨갛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목이 메었다. 온종일 통화가 되지 않는 남편은 무얼 하고 있을까? 이 복잡한 감정을 숫자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 나를 아내라 부르는 시아버지는 도대체 나와 무슨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것일까? 그녀는 인연을 믿었다.
오랜 세월 마음속으로 그리던 친구 오빠가 거짓말처럼 그녀가 일하는 안경원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 사람의 사라진 아버지를 찾으러 온 세상을 헤매다 인연 있는 섬 증도에서 마침내 발견했을 때, 그리고 조그만 절에서 아무도 보는 이 없이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을 때, 그녀는 긴 인연의 실 가닥이 구불구불 자신에게 이어져 있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시아버지가 늘 치매상태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드물지만 아주 멀쩡할 때도 간혹 있었다. 그럴 때는 참 인자한 아버지로 돌아와 자신이 살아온 거짓말 같은 옛날이야기를 해주었다.
바라만 봐도 목이 메는 붉은 노을이 서서히 어둠 속에 먹혀들어가 금세 사방이 캄캄해졌다. 양 미간을 찌푸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갯벌 속의 뭇 생명이 하늘로 이사를 해서 알알이 들어가 박힌 것만 같았다. 갯벌에는 물이 들어차 아침이 오기 전까진 뭍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펜션 주인 할머니와 셋이 앉아 밤하늘을 쳐다보는데, 그 순간 깜빡 시아버지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 본 터라 그들은 언제나 하는 똑같은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경청했다. 이상하게도 시아버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늘 같은 이야기였지만, 할 때마다 새끼를 쳐서 몰랐던 사실들이 한둘씩 드러났다. 증도의 캄캄한 하늘, 별을 세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심심하지 않았다. 목이 멜 것 같은 노을보다는 캄캄한 하늘이 그녀는 좋았다. 밤에는 하늘이 낮에는 갯벌이 온통 커다란 하나의 우주가 되어 사람들을 품어 안는 곳, 시아버지는 그 갯벌과 하늘을 친구삼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육이오 전쟁 때 갓난이였던 그는 어머니 품에 안겨 그 추운 한겨울에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으러 길에 나왔다가 피난민 행렬 틈바구니에 휩쓸려 길을 잃어버렸다. 고향인 함흥에서 피난민 행렬에 밀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모자는 흥남까지 밀려 걸어가 피난민들이 아우성치는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마침 아이를 품에 안고 어쩔 줄 모르던 어머니는 부두에서 고향 사람을 우연히 만나, 목사인 남편이 가족을 찾으러 집에 갔다가 길이 어긋나 국군을 따라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가 가족을 두고 내려갈 수 없다고 발버둥치는 걸, 목사라서 더욱 위험하다고 생각한 친분이 있던 미군 대위가 억지로 배를 태웠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모자는 아우성치는 마지막 피난민대열에 끼어 배를 탔다. 피난민들로 아우성치는 흥남부두의 살풍경을 갓난이가 기억할 수 없는 게 당연했지만, 시아버지는 마치 눈에 본 듯 그 광경을 자세히 설명하곤 했다. 누군가 시아버지 귀에 귀가 닳도록 들려준 이야기가 틀림없었다. 기를 쓰고 울어대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시아버지의 어머니는 죽을힘을 다해 배에 올랐다. 콩나물시루 같은 배 안에서 피난민들 틈에 끼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모자는 부산까지 내려갔다. 그 지옥 같은 아수라장 속에서 그들을 지켜준 건 남편이 배를 타고 남하했다는 소식을 알려준 고향 사람이었다. 그는 가족 하나 없이 혼자 소작농으로 뼈가 굵은, 목사였던 시할아버지 교회에 나가던 독실한 교인이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갓난이를 품에 안고, 가엾은 모자를 보살폈다. 그들이 도착한 건 부산 외곽지대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였다. 그 후 모자를 돌본 것도 그 고향 사람이었다. 얼마 뒤 시아버지와 그 어머니와 고향사람은 당시 정부의 피난민 정책의 일환의 대열에 끼어 증도의 염전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시아버지의 기억은 늘 증도의 아름다운 소금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염전에서 시작되었다. 모자를 보살펴준 성실한 소작농이던 고향 사람은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그곳에 없어서는 안 될 소금 장인이 되었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난 몇 년 뒤 가족을 찾아온 세상을 다 헤매던 시아버지의 아버지가 염전에 나타난다. 그들 가족의 상봉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어디선가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시아버지의 어머니는 이미 고향 사람, 소금 장인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영화 ‘남과 북’의 주제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를 떠올리게 하는 슬픈 사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