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는 증도로 가는 길 내내 며느리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손은 시아버지에게 잡힌 채 그녀는 섬을 향해 달렸다. 식물들이 제대로 숨을 쉬라고, 별을 보기 좋으라고, 밤에는 완전히 불을 끄는 섬, 그녀는 칠흑처럼 캄캄해진 증도의 밤이 좋았다. 마침 차가 막히지 않아 그들은 한낮에 섬에 도착했다. 염전에 핀 하얀 소금 꽃들을 바라보며 시아버지는 노래를 불렀다. 그가 기분이 좋을 때 부르는 노래는 노랫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 해독할 수 없었다. 그녀의 귀에는 시아버지가 부르는 노래가 그저 ‘우르르 쾅, 우르르 쾅.’ 이렇게 들렸다. 어쩌면 이게 바로 소금 언어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순간순간 바뀌는 풍경에 따라 시아버지의 자아도 바뀌었다. 마치 잠에서 깰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노두 길 건너 갯벌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펜션에 도착하자마자 시아버지는 주인 할머니를 찾아 단숨에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인 할머니와 시아버지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와 아들처럼 부둥켜안았다. 그들을 남겨두고 화도를 빠져나와 그녀는 섬을 한 바퀴 돌며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다본 태평 염전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매년 15,000톤의 천일염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의 염전에는 67동의 건물이 3km에 걸쳐 늘어서 있었다. 그녀는 자택과 목욕탕과 관리 사무실 등이 아직도 남아있는 곳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보냈을 시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보았다. 그녀는 요즘 없던 버릇이 생겼다. 잠을 쪼개서 나눠 자는 버릇이었다. 그렇게 쪼개자는 잠 속에서 그녀는 매번 다른 역할을 했다.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그저 밤하늘의 별을 세거나 머릿속에 펼쳐지는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는 양의 숫자를 한 마리 두 마리 세면서 외로움을 달래던 어린 시절의 그녀, 그녀에게 수학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던 지금의 남편을 마음속 깊은 서랍 속에 묻어두던 사춘기 시절의 그녀, 그 사람을 꿈에서처럼 다시 만나 결혼을 한 그녀, 남편의 아버지인 시아버지의 오래전 죽은 아내로 환생한 그녀, 그 많은 역할은 그녀에게 버거웠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 시아버지의 사랑법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그 사랑은 마치 그녀가 좋아하는 숫자들 같았다. 말 없음 0, 보고 싶다 7, 그립다 8, 손잡고 싶다 9…… 그 이상의 숫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손을 잡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숫자의 사랑이었다. 억도 조도 아니 그것보다 훨씬 많은 무한대의 사랑은 0에서 9까지의 숫자로 모두 표현되었다. 원래 조용하고 누구에게나 품성이 좋은 사람으로 불리던 그에게 치매라는 병조차도 우아하게 찾아왔다. 첫째 그는 며느리를 아내로 착각하는 것 외에는 그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늘 책을 읽었다. 물론 책의 내용을 하나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늘 책을 끼고 살았다. 신기하게도 수학교사였던 시아버지가 끝내 놓지 못하는 책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관한 책들과 파브르의 곤충기였다. 예전에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것들도 그의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책은 그에게 백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시아버지는 온종일 책장을 넘겼다. 뭘 보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기만 했다.
그녀는 그런 시아버지가 좋았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잠들었을 때 가끔 그 책들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그 암호 같은 말들이 그녀는 좋았다. ‘중력이 시공간을 왜곡시킨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운동계에서는 외부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어떤 질량을 가진 물질도 빛의 속도에 도달할 수 없다.’ 등등. 피로가 몰려올 때마다 시아버지의 책을 들여다보면, 뭔지 하나도 모를 공식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그녀의 머릿속에서 반짝였다. 소금박물관에도 들어가 보고, 소금 카페에 들어가 차도 한 잔 마시고 하면서 그녀는 오랜만에 완전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누가 고독을 외롭다 하는가? 그녀는 예전에 자신이 지녔던 고독을 되찾고 싶었다. 아니 이 세상에는 혼자의 고독과 둘의 고독과 여럿의 고독, 군중 속의 고독이 있을 뿐, 그 아무도 고독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런 하염없는 생각들 사이로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물이 들어올 듯 말듯 찰랑거리는 노두 길로 접어들었다. 펜션의 벤치에 앉아 주인집 할머니와 시아버지가 그녀를 기다리고 앉아 있었다. 집 나간 아내가 오랜만에 돌아온 것처럼 반가워 팔짝 뛰는 시아버지가 그녀 역시 아주 반가웠다. 너른 갯벌에 해가 지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처럼 아름다운 일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