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도로 들어가는 노두길 바닷가 끝자락에 아버지가 계셨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증도의 여러 섬 중에도 다리 하나만 건너면 도달하는 화도는 옥황상제의 딸 선화공주가 이곳에서 귀양살이하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꽃을 가꾼 것이, 온 섬에 가득 핀 꽃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여행 책자에는 씌어 있었다. ‘바닷가 펜션’이라고 팻말이 붙여져 있는 단층 가옥 한쪽 큰 방에서 한 노인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낮이라 그런지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우두커니 방 앞에 서 있었고, 친구 오빠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아버지를 끌어안았다. 눈물을 흘리며 그가 아버지를 불렀을 때, 아버지의 반응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누구세요?” 하는 한 마디였다. 아버지는 많이 늙어 보였고, 아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집으로 가자고 말하는 아들을 보고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물만 만지던 노인은 방 밖에 정물처럼 서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뛰어나왔다.
“당신을 얼마나 찾았는데,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 오는 거요?” 아버지의 절규 가까운 목소리에 당황한 그녀도 갑자기 눈물이 났다. 세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 앉아 아버지가 내오는 생선회 한 접시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소주도 한잔하라며 두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는 아버지는 너무 멀쩡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아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노인은 아들이 데려온 여자만 쳐다보았다. 그동안 고생은 안 했느냐? 뭘 먹고 살았느냐?
그런 질문들에 아무런 답도 할 수가 없는 그녀는 슬며시 일어나 방을 나왔다. 나오다 보니 몸집이 좋은 할머니 한 분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가까이 보니 할머니보다는 아주머니에 가까운 고운 자태를 지닌 분이었다. 할머니를 보자마자 아버지는 마치 엄마를 본 어린아이처럼 뛸 듯이 좋아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뒤 할머니가 말했다. 처음 노인을 만났을 때, 소금 창고가 길게 늘어서 있는 소금밭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했다. 금지구역이니 나가라고 아무리 말해도 막무가내로 버티고 앉아 줄기차게 엄마를 찾아 달라 했다.
마침 염전을 구경하러 온 손님들을 태우러 갔다가 울고 있는 노인의 사연을 물으니 일 나간 엄마를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고 했다. 얼굴을 보니 얌전하고 깨끗한 노인으로 보여 데리고 와서는 펜션에서 이일 저일 맡겨보니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생각 속에서 시간이 자유자재로 이동했다. 염전에서 소금을 만드는 일을 하던 어머니와 오래전에 아이 둘을 남기고 일찍이 세상을 떠난 아내와 아들의 이혼한 아내와 아들이 데리고 온 처음 보는 여인의 얼굴들이 서로 뒤섞여 아버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버지는 누가 누군지 자기 삶 속의 여인들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나이 든 여인은 어머니로 젊은 여인은 아내로 생각되었다. 그건 치매도 아니고 정신 분열도 아니고 그저 시간 여행이었다. 몸집이 좋고 얼굴이 고운 펜션 주인 할머니는 노인이 불쌍해서 밥도 해주고 옷도 사주고 하면서 마침 자신도 외로운 처지라 가족처럼 지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끔 정신이 번쩍 들어서는 아들을 찾으러 서울 가야 한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펜션에 묵는 손님들에게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통사정을 하곤 했다. 할머니는 어느 날씨 좋은 봄날, 손수 운전해서 노인을 태우고 서울을 향해 떠나 안 가본 데 없이 아들을 찾아 헤맸다고 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눈앞에 있는 아들을 못 알아보는 것이었다.
늙음이란 얼마나 외롭고 허무한 것일까? 아니 죽음이란 우리를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자신을 젊어서 죽은 아내로 착각하는 고독한 노인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문득 언젠가 텔레비전 교육방송에서 본 인상적인 다큐멘터리 영화의 영상들이 떠올랐다.
제목이 ‘티베트의 소금장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