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와 두 번 이혼한 여자 3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친구 오빠와 안경원 근처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한 번쯤은 꼭 만나고 싶었던 그 사람이 지금 여기 눈앞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뜻밖이다. 안경사라니. 네가 안경학과에 입학했다는 걸 듣고 그런 학과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참 이 세상엔 내가 아는 것 빼곤 다 모르는 것 투성이지.”
그녀는 왜 자신이 오랜만에 마주앉은 그를 가끔 떠올렸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사려 깊었고, 남의 말을 조용히 들어 줄 줄 알았고, 잘난 척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한없이 섬세한 숫자들처럼 섬세하고 따뜻했다. 그녀는 그를 만난 뒤로 숫자가 따뜻하다는 생각을 처음 해 보았다. 숫자란 얼마나 냉정한 기호인 걸까?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면 우선 순번을 정하는 번호표를 뽑아야 한다. 감옥에 갇힌 죄수도 숫자로 구분된다. 1213호 뭐 이런 식으로. 아니 우리들의 주민등록번호도 여권번호도 아파트도 공동묘지도 다 숫자로 구분된다, 어쨌든 이 냉정한 숫자의 아름다움을 일찌감치 가르쳐준 그에게 그녀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먼저 물었다. “나도 그렇지만 너도 너무하다. 어떻게 그렇게 연락 한번 안 해?,” 사실 그들 사이의 매개체였던 친구와 연락이 끊긴 지 오래여서 그녀는 그가 이혼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왜 헤어지는 것일까?
감정도 숫자처럼 질서정연하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그녀는 잠시 숫자 같은 사랑을 꿈꾸었다. 오만삼천육백구십의 사랑, 그녀가 머릿속에 한없이 길어지는 숫자들을 풀어놓을 때, 그가 말을 꺼냈다. “이혼하는 거 어려워 보이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굉장히 쉬워. 오랫동안 내 곁에 있었던 아내가 이혼하자 그랬을 때 잠시 귀를 의심했어. 하긴 내가 아내에게 많이 부족했지.” 절대 이혼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그가 이혼한 사유는 이랬다.
집안의 장남이던 그가 결혼한 지 3년 만에 자식 사랑이 유난히 끔찍하던 아버지에게 치매가 왔다. 처음에 아버지의 증세는 가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정도였다. 일찍이 아내를 여의고 혼자 사시던 아버지는 치매 증세가 하루하루 심해져 혼자 내버려둘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모시고 와 같이 살게 된 부부는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견뎠다. 아버지의 치매는 며느리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착각하는 증세로 발전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난 뒤 시아버지와 단둘이 집에 있어야 하는 며느리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었다. 시아버지는 틈만 나면 며느리 손을 잡고 산책하러 나가자 졸랐다. 어느 날 오후 시아버지는 한강 둔치로 산책하러 나가서는 술래잡기를 하자 했다. 눈을 가리고 열을 센 다음 눈을 뜨니 시아버지는 없었다. 온종일 찾아도 시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에 실종자 신고를 하고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부부 사이는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 때문에 아버지가 실종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그의 아내는 그 모든 일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남편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 부부는 이혼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속사정을 들으며 그녀는 잠시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마신 와인 한잔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커다란 접시에 담긴 해산물 파스타 때문이었을까? 자신이 숫자를 사랑하게 해준 그 사람의 아내가 된 장면을 상상했다.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가 자신을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와 착각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시아버지는 그녀에게 산책하자고 조른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산책길에 나선 그녀와 시아버지는 어딘가 알 수 없는 언덕의 끝없는 계단을 오른다. 어쩌면 네팔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걸어 올라가는 끝없는 계단 길인 것도 같다. 아주 높은 산꼭대기 절벽에 이르자, 갑자기 시아버지가 그녀를 산 밑으로 밀어버린다. 상상 속 아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문득 그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상상을 한다. 왠지 앞에 앉은 그 사람이 그녀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걸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