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와 두 번 이혼한 여자 2
화려한 강남의 대로에 위치한 수입 안경원의 안경사로 일하게 된 그녀는 매일 하얀 가운을 입고 손님들을 맞았다. 마음에 드는 안경을 고른 뒤 시력을 재는 사람들 앞에 서면 그녀는 언제나 잠시 동안 호흡을 골랐다. 어릴 적의 꿈이던 검안사의 역할은 생각보다 더 단조로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싫지 않았다. 하루 종일 손님이 몇 없는 날도 있었고, 반대로 눈코 뜰 새 없는 날도 있었다.
그 어떤 날이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녀는 수없이 많은 안경 속에 둘러싸여 있는 게 행복했다. 손님이 별로 없는 날은 새로운 안경 디자인을 스케치하곤 했다. 똑같은 일의 반복이 아닌 일이 있을까? 우리들의 일상은 늘 그렇게 똑같은 일의 반복에서 시작되어 똑같은 일의 반복으로 끝난다. 하루 종일 접시를 닦거나 사람들의 시력을 재거나 수술을 하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시체를 닦거나 어쩌면 모든 직업은 반복이라는 면에서 닮아있다. 그 반복의 단조로움에 길들여지지 않으면 생활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법이다. 그녀는 아주 가끔 일탈을 꿈꾸었다. 이태리제 명품 선글라스를 끼고 유럽의 거리를 쏘다니는 풍경을 상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 누군가 안경원 안으로 들어와 어디선가 들어본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이네. 예뻐졌네.” 그렇게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반가워하는 사람은 오래전 수학의 기쁨을 알게 해 준 친구 오빠였다.
사는 게 하도 따분해서 안경이나 새로 바꾸려고 들어왔다며 그는 안경 하나를 골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고도근시에다 난시가 심했던 그는 예전에 늘 알이 두터운 안경을 쓰고 다녔다. 이렇게 얇은 렌즈도 있다니 세상이 너무 좋아졌다며 갑자기 행복해진 얼굴로 밥이나 같이 먹자 했다. 마침 문을 닫을 시간이라 그러자고 하면서도 그녀의 마음속에 약간의 떨림이 일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단 한 번도 남자와 단둘이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그 흔한 미팅 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있었을까?
몇 년 전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친구 소개로, 아내를 여의고 혼자된 대학교수와 재혼을 했다. 그 뒤 원룸을 빌려 죽 혼자 살아온 그녀에겐 누군가를 마음에 담을 여유가 없었다. 혼자 힘으로 사는 게 빠듯하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마른 몸매에 깨끗하고 창백한 피부를 지녔지만, 남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하루 종일 곁에 있어도 사람들은 그녀를 그곳에 없는 사람 취급하곤 했다. 그녀는 그게 오히려 편했다. 친구도 별로 없었다. 같이 안경학과를 졸업하고 안경사로 일하다가 안경을 맞추러 온 미국인과 결혼해서 뉴올리언즈에서 사는 친구가 딱 하나 있었다.
그 친구로부터 자주 이메일이 왔다. 그 친구와 주고받는 메일이 그녀의 유일한 타인과의 소통이었다. “뉴올리언즈는 미국이지만 유럽 같아. 하지만 유럽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곳이 이곳 뉴올리언즈야. 해질 무렵 흑인 음악가들이 재즈 연주를 하는 카페에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해지는 거리를 내려다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네가 꼭 와보길 바래.”
똑같은 일상의 반복에 지칠 때마다 그녀는 뉴올리언즈의 해지는 거리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녀가 외로운 삶의 한가운데서 얼핏 떠올린 남자가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는 바로 그녀에게 수학의 기쁨을 가르쳐준 고등학교 시절 친구 오빠였다. 남들이 들으면 거짓말 같겠지만 그녀의 감성 노트는 빈 노트였다. 그녀의 마음속엔 오직 점점 작아지는 숫자들이 새처럼 날아가는 하얀 시력검사 판이 있었다. 아니면 캄캄한 밤에 별을 헤는 것도 그녀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잠 안 오는 밤에 눈을 감고 양의 숫자를 세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숫자를 세거나 시력을 재거나 할 때마다 아주 가끔 그녀는 수학을 가르쳐준 그를 떠올렸다. 그건 마치 그림 그리는 일을 가르쳐주거나 기타를 켜는 일을 가르치는 것하고도 비슷했다. 숫자는 그녀에게 감성으로 다가와 하늘을 향해 날아가 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