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점 ‘메리 포핀스’ 3
커피가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군요. 커피 한 잔을 뽑아서 소리가 나지 않는 첼로 곁에 놓인 골동의자에 앉아보아요. 문득 밥 딜런의 ‘one more cup of coffee’가 듣고 싶어져요. 수녀시절 저는 혼자 그 노래를 즐겨 들었어요.
제 남편이 된 그 사람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들이 다 우울증 환자였다고 말하더군요. 제가 좋았던 이유는 마음이 건강하기 때문이랬어요. 정말 저는 우울증이 뭔지 몰라요. 심심한 것조차 재밌는 걸요. 움직이지 않는 골동품 사이를 걸어 다니며 저는 사물들에게 말을 걸어요.
소리가 나지 않는 첼로나 오래된 고장 난 라디오에게 다가가 마법이 풀리기를 기도하지요. 그럼 정말 안 들리던 라디오가 조그만 신음소리를 내기도 해요.
어느 영화에선가 들었던 대사 한마디가 갑자기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때리듯 아프게 떠올라요. 시간을 낭비한 죄, 그래요. 제가 수녀생활을 했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세월이 시간 낭비는 아니었을까요? 결국 제게 어울리지도 않는 수녀생활을 끝내고 그 사람과 함께했던 그 아득한 시간들이 시간 낭비였을까요? 아니, 제 온 생애가 다 시간 낭비는 아닐는지요. 우리의 삶이 낭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쯤일지 궁금해져요.
저와 결혼을 한 뒤에도 남편의 아내 찾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가끔 남편은 퇴근 후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출장 가는 거라고 핑계를 대곤 했지만, 누군가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가는 눈치였어요. 모르는 척하는 제 마음은 황량한 바람이 부는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죠. 어쩌면 남편은 그녀들의 우울증을 사랑한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네요. 그는 세상사는 일이 너무 힘들다, 회사 다니기 싫다, 그렇게 매일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집에 돌아와 그냥 당신을 의지하며 같이 가게나 돌보면 안 되겠느냐 물었어요. “쉬고 싶다.” 남편의 지친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어쩌겠어요? 우리는 할 수 없이 24시간 붙어있게 되었어요. 차라리 풀빵을 굽는 게 나았을 거예요. 한 사람은 반죽을 하고 한 사람은 틀에 넣어 풀빵을 굽고, 서로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하루 종일 골동품 속에 파묻혀 손님을 기다렸어요. 이상하게도 그와 같이 있는 날은 손님이 더 없었어요. 가끔 한 사람도 오지 않는 날도 있었죠. 마치 대학 시절 보았던 연극 속의 ‘고도’를 기다리는 기분이었어요. 언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상처는 전염된다는 생각이 드네요. 남편은 저를 사랑하고 의지했지만 제게 평화를 주지는 못했어요. 혼자 고도를 기다리는 일은 그리 나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둘이 함께 고도를 기다리는 일은 그렇게 힘이 들까요? 남편의 한숨 소리가 가게의 적막을 뚫고 고장 난 라디오의 신음처럼 들리곤 했어요. 하나의 고독에서 하나의 고독을 빼면 우리 둘 중 하나라도 고독하지 않아야 되죠. 하지만 하나의 고독에 다른 하나의 고독을 곱하는 격이었어요.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는 제 남편의 아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져요. 그녀가 행복해야 남편의 우울증도 나을 것 같아서요. 저는 수녀생활과 결혼생활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렇고말고요. 남편의 한숨 소리는 점점 더 커졌어요. 어느 날부터 그는 가게에 나오지 않기 시작했어요. 밤새도록 인터넷을 뒤지며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아졌죠.
친구가 한다는 다단계 사업에 관심을 가지더니 아예 푹 빠져버렸어요. 골동품도 많은 판에 그는 수많은 물건들을 사들였어요. 비누, 세제, 화장품, 치약, 각종 건강식품, 일단 본인이 쓰기 시작해야 남들도 쓰는 거라더군요. 하도 조르는지라 우리는 가게 문을 닫고 다단계 사업 설명회장에 가서 앉아 있곤 했어요. 저는 문득 이것이 일종의 종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선 믿어야만 다단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거거든요.
남편의 문제점은 처음엔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그저 외로운 남자처럼 보여서 그 외로움을 덜어주는 일이 행복하기도 했죠. 하지만 남편의 문제점은 조금씩 조금씩, 라디오의 채널을 돌릴 때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커져가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