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 11
그녀는 마치 손닿을 수 있는 거리에 사라진 그 사람이 서 있기라도 한 듯 허공의 한 점에 시선을 박고 말을 이었어요.
“그 사람은 그냥 거짓말처럼 수증기가 증발하듯 그렇게 사라졌어. 한 두 시간 그렇게 기다리다가 나는 무슨 일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지. 경찰을 불러 샅샅이 다 찾아보았지만 그는 없었어.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어. 그래도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도넛을 한 상자 들고 돌아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어. 어느 날 나는 퇴근을 한 뒤 일하던 사무실 근처를 서성이다가 어느 조용한 모퉁이에 숨어 있는 신비한 가게에 들어섰어. 타로카드와 신비로운 색깔을 띤 돌들을 파는 가게였어. 금박을 두른 오래된 책들에서 나는 책 냄새와 향냄새가 뒤섞여 그 조그만 가게 안은 아주 묘한 분위기를 발하고 있었어.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중세의 점성술에 관한 책을 뒤적이다가 어떤 페이지에 눈이 멈췄어. ‘떠나간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법’이라는 구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거야. 그 페이지에는 ‘발가락 사이에 포도를 끼고 걸을 것’이라 씌어 있었어. 그 후 나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어. 발가락 사이에 포도를 끼워 넣고 걷는 버릇이.
포도를 발가락 사이에 끼고 걷는 일은 쉽지 않았어. 어쨌든 그러던 어느 날부터 나는 도넛을 먹지 않게 되었어. 먹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어. 그리고는 점점 체중이 줄었지. 하지만 포도를 끼워 넣고 아무리 걸어도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어.
그렇게 시간이 흘러 첼로와 도넛이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나는 첼로를 켜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아니 첼로를 판 다음부터 내 마음은 굉장히 홀가분해졌어.
운이 좋아 규모는 크지 않아도 탄탄한 미국회사에 취직을 했고, 나는 그저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했어. 그렇게 살면서 순간순간 네 생각이 났어. 결혼은 했을까? 행복하겠지? 뭐 그런 식으로 말이야. 이렇게 널 갑자기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저도 모르는 새 철이 콱 들어버린 낯선 그녀를 바라보며 저는 할 말을 잃었어요.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녀도 저도 그때 그 사람이 아니어서 우리 사이엔 공유할 아무것도 없었어요. 엉뚱하게도 저는 그녀의 오래된 첼로의 향방이 궁금해졌어요. 그녀 자신보다 그녀의 첼로를 더 그리워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럴 수 있는 일이죠.
사랑이 가도 사물의 기억은 남는 거니까요. 문득 그 옛날 음악 선생님의 첼로가 떠올랐어요.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었던 날부터 저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녀가 연주하던 첼로를 그리워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월이 흘러 거짓말처럼 우연히 부딪힌, 나이 든 그녀가 들고 있던 그 낯익은 첼로도 떠올랐어요. 그 첼로가 뚱뚱한 내 사랑 그녀의 첼로가 틀림없었다는 기억은 제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죠. 아내가 켜던 첼로 소리도 떠올랐어요. 그 외롭고 스산하던 아내의 첼로 소리는 늘 뚱뚱한 그녀를 생각나게 했어요. 하지만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 오래된 그리움의 끝에서 만난 그녀는 내 사랑 뚱뚱한 그녀가 아니었어요. 더 이상 그 아름다운 음률을 연주하던 나만의 그리운 사람도 아니었고요.
사랑이란 참 우스워요. 기억 속의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다른 사람일 때 우리는 허무해지지만, 동시에 참 홀가분해지죠. 그녀로부터 자유로워진 기분, 이제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의 출발신호 같은 거랄까요. 그녀와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뒤 우리는 헤어졌어요. 하지만 저는 알고 있었죠, 이제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