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 10
그녀는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채 쌓아두었던 사람처럼 말들을 쏟아냈어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의사 삼촌이 공항에서 기다리는 걸 교묘하게 따돌렸어. 그리고는 첼로를 들어준 그 남자가 사는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집을 빌렸어. 이민자들이 사는, 공동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는 아주 초라한 곳이었어. 그곳에는 각 나라 이민자들이 모두 모여 살고 있었어. 베트남 쿠바 멕시코 이란 이라크 필리핀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냐 짐바부에 수단 콩고 등등. 말로만 듣던 그 많은 나라 사람들과 모여 사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았어. 하루 종일 싸우는 소리, 애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어. 나는 귀마개를 하고 첼로를 켜곤 했어. 그리고는 하루 종일 그 사람을 기다렸어. 건축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우연히도 도넛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그는 도넛이 가득 든 상자를 들고 내 방문을 두드렸어.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도넛만 먹으며 몇 달을 살았어. 부모님이 사라진 나를 울며불며 찾으리라는 게 마음에 늘 걸렸지만 난 병원 냄새를 정말 맡기 싫었어. 또 병원에 가서 신경안정제를 맞고 눈이 게슴츠레 풀려 있을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지. 난 첼로와 도넛만 있으면 살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내 건축가 친구는 도넛만 먹는다는 게 뭐가 그렇게 이상한 일이냐며, 내가 극히 정상이며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곤 했지. 듣고 보니 살이 찌는 것 외에는 나는 극히 정상이었어. 알고 보니 그 친구도 도넛만 먹으며 끼니를 때우고 있었어. 문제는 그가 매일매일 말라간다는 거였어. 한국에 살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길이랬어. 얼굴은 미국인이지만 사실 그는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입양아였어. 어머니는 화가이고 아버지는 유태인 목사였다는데, 그들이 이혼을 하는 바람에 그는 또 혼자가 되었지. 그는 어머니를 참 좋아했어.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며 틈만 나면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지. 그 사람도 너처럼 내가 켜는 첼로 소리를 사랑했어. 사실 나는 어릴 적에 음악보다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어머니가 못 이룬 꿈을 내게 심은 거였지.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열 살 때부터 첼로를 연주했는데, 난 그리 성공도 못 한 채 비싼 첼로만 들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지. 어쨌든 그렇게 일 년을 살고 보니 가져온 돈이 다 떨어져 버렸어. 그때 첼로를 팔았어. 그 피 같은 돈도 다 떨어져 버리고, 그제야 할 수 없이 서울의 집에다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를 않는 거야. 할 수 없이 의사 삼촌에게 전화를 했어. 참 철없는 내 인생을 어떻게 속죄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그녀의 눈에 눈물이 어렸어요. 어떻게 나를 그리 쉽게 잊을 수 있었느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어요.
“사업이 기울어가던 참에 아버지는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 빚보증을 선거야. 그 아저씨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거고. 운이 나빴지. 하루아침에 쓰러진 아버지는 병원에 누워계시고, 온 집 안에 빨간 딱지가 붙은 장면을 목격한 고생 하나 안 하고 자라 늙은 울 엄마는 아무런 힘이 없었어. 삼촌 덕분에 부모님을 미국으로 모셔와 내가 모시고 있어.”
문득 그녀가 철이 콱 든 어른처럼 보였어요. 그녀의 초라함은 차라리 성숙함이었어요.
제가 그럼 그 건축가 친구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슬픈 얼굴로 말을 이었어요. “도넛으로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던 그 사람은 점점 말라서 뼈만 남게 되었어. 내가 부모님을 모셔와 그 초라한 이민자아파트에서 지내던 어느 추운 겨울날, 마침 크리스마스가 그 사람의 생일이었어. 조금씩 회복해가는 아버지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우리는 디즈니랜드로 여행을 떠났어. 정말 처음 가는 밀월여행이었지. 그 옛날 너랑 같이 가고 싶던 디즈니랜드에 나는 그 사람과 함께 갔어. 우리는 수많은 놀이기구를 타며 정말 즐거웠어. 그런데 놀이 기구 중에 우주선을 타고 뺑뺑 도는 게 있었어. 우리나라의 놀이공원에 있는 청룡열차 같은 건데 훨씬 더 무서웠어. 타자마자 안경이 막 날아가는 거야. 우주 밖으로 아주 멀리 날아가 버린 것 같던 내 안경은 내릴 때 보니 바로 코앞에 있었어. 무서운 것도 그냥 쇼였던 거지. 우주선에서 내린 뒤 그 사람은 잠시 너무 어지럽다며 화장실에 갔어. 그게 그 사람을 마지막 본 날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