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 4
뒷모습부터 어딘가 낯이 익던 그녀는, 정말 놀랍게도 언젠가 내 심장을 가져간 음악선생님 그녀가 틀림없었죠. 그녀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어요.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했던 걸까요? 그것도 아니면 기억을 모두 잃은 건지도 모르는 일이죠. 저 역시 억지로 그녀의 기억을 되돌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 첼로의 주인을 본 적이 없고, 그저 뉴욕의 유명한 악기점에서 산 거라더군요.
“선생님 저를 모르십니까?”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은 입에서 맴돌 뿐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어요. 그 똑같은 첼로가 이 세상에 하나뿐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저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죠. 그건 틀림없는 그녀의 첼로였어요. 젊을 때도 그렇게 미인은 아니었던 음악선생님은 나이 든 모습이 오히려 보기 좋았어요. 차가운 바람이 불던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훈훈함이 감돌았어요. 저는 갑자기 그때 그 옛날처럼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 그녀를 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죠. 우리는 그렇게 모르는 사람처럼 헤어졌어요.
언젠가 보았던 흑백영화가 생각나더군요. 제목이 <올림픽>이었던 것 같은데, 어쩜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우리의 기억은 늘 불확실하니까 말이죠. 정말 음악선생님과 저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을까요? 어쩌면 꿈이었을지도 모르죠. 하긴 꿈과 현실이 뭐 그리 다르겠어요. 지나간 날은 지나간 꿈이고 다가올 날은 아직 꾸지 않은 꿈일 뿐이죠.
영화 속에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두 남녀가 재회를 약속하고 약속장소로 나갔어요. 어느 거리 어느 길목에서 만나자 그런 식이었죠. 세월이 많이 지나 서로를 몰라보고 스쳐 지나가는 마지막 장면은 제 기억 속에서 내내 잊히지 않았어요. 여자는 늙어버렸고, 남자는 어른이 되었던 거죠. 마치 그 장면이 저 자신의 이야기에 오버랩 되더군요.
어쩌면 저도 모르게 오래도록 기다렸던 ‘재회’란 그처럼 허무하거나 싱겁거나 아무 의미 없는 장면에 불과하다는 걸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죠. 제 모든 방황과 고독의 장본인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문이 닫혔을 때, 저는 순간 무언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기억의 두꺼운 장부에 ‘지나감’이라는 검은 글씨가 새겨지던 순간이기도 했죠.
이제 도넛을 좋아하는 ‘내 사랑 그녀’만 기억 속에서 처치하면 될 것 같았어요. 그렇게 싱겁게 재회하고 나면 저는 두 번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군복무를 마치고 졸업을 하고 대기업에 취직을 해서 꽤 유능한 사원이라는 딱지가 붙을 무렵, 사촌 누나가 하도 선을 보라 그러기에 어느 토요일 오후 약속한 하얏트 호텔 커피숍에 나가보았죠. 커피숍에 붙어 있는 테라스는 제가 좋아하는 공간이었어요. 여름날 저녁이면 도넛을 좋아하는 그녀와 함께 그곳에 앉아 비싼 생맥주를 마시곤 했죠. 호텔에서 데이트할 여유가 없었던 제 대신 그녀는 늘 밥값이며 술값이며 거의 모든 데이트 비용을 기꺼이 내곤 했어요. 제가 할 수 있었던 건 그녀에게 도넛과 커피를 사주는 게 고작이었죠. 한남동 집들이 내려다보이는 고즈넉한 그곳에 앉아 그녀는 늘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녀가 보고 싶으면 그곳에 찾아가면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저는 쩍하면 그곳에 가서 하루 종일 앉아 있곤 했어요. 그 비싼 생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요. 약속시간보다 한 삼십 분 먼저 나가 그 고즈넉한 공간에 앉아 있노라니 그 옛날이 아슴푸레 떠오르더군요. 나날이 뚱뚱해지던 그녀와 다시는 이곳에 올 수 없었던 그 슬픈 사연에 아직도 목이 메어왔어요. 그녀 이후 여자를 사귄 적이 없었냐고요? 그건 아니죠.
오히려 저는 너무 많은 여자를 만났어요. 그녀를 잊는다는 핑계로 어쩌면 매일 다른 여자를 만나기도 할 정도였죠. 지금 생각하니 누구를 잊기 위해 함부로 사는 건 핑계일 뿐, 그렇게 살다 보면 함부로 제 몸과 맘을 내던지며 사는 그 존재가 바로 원래의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죠. 저는 그런 자신이 뼛속 깊이 싫어지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오직 내 사랑 그녀 외에는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