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2
누군가 그렇게 썼었죠. 현실세계란 바늘로 찌르면 붉은 피가 나오는 곳이라고요. 꿈속에서도 바늘로 몸을 찌르면 피는 나지만, 깨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죠.
가끔 현실이 꿈같을 때가 있는 법이죠. 그날도 그랬어요. 결혼한 지 육 개월이 지나가던 어느 봄날, 이제는 처제가 된 그녀는 우리 집에 오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고 길가에 서 있었어요. 하필 그날따라 택시는 좀체 오지 않았고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드디어 나타난 택시에 몸을 실었어요. 그리고는 몇 초 후 뒤에 오던 트럭과 삼중추돌 사고가 나버린 거죠. 그렇게 그녀는 세상을 떠났답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그 시절 어느 집에나 있던 자동응답기를 돌리니 그녀의 음성이 남아 있었어요. “지금 오빠한테 가는데 차가 너무 안 오고 너무 추워.” 추운 봄날은 겨울보다 더 우리를 춥게 느끼게 하곤 하지요. 기타를 배우겠다고 얼마 전에 사놓고 우리 집 거실 한쪽 구석에 세워놓은 그녀의 기타를 바라볼 때마다 제 가슴에 바늘이 꽂히는 기분이었어요. 온몸과 마음에 바늘이 꽂혀도 피가 나지 않는 이 현실은 도대체 꿈인지 생신지 알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가고 있었죠. 저는 그녀를 생각하며 수많은 노래를 만들었어요. 서랍 속에 넣어둔 일기장에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 적혀 있었죠. 그녀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기 전엔 그게 남자와 여자가 하는 사랑이라고는 생각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집에서 같이 밥을 먹을 때도 우리는 눈이 부딪칠 때마다 외면하곤 했어요. 정말 어떤 날은 그녀를 안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었죠.
하지만 그건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저는 분명히 아내를 사랑했어요.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고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인간 세상의 질서를 위한 게임의 규칙일 뿐, 우리는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고 말고요. 어느 날 아내가 없을 때 불쑥 찾아온 그녀는 아이처럼 달려와 내 품에 와락 달려들곤 했었죠. 그러면 저는 맘속으로는 그녀를 힘껏 껴안아버리고 싶었지만 장난스럽게 밀어내며 머리에 꿀밤을 먹이곤 했어요. 돌이켜 생각하니 그게 다 사랑이었어요. 그녀가 세상을 떠난 그해 봄, 세월은 참 느리게 흘러갔어요.
그렇게 천천히 가는 세월은 그 이후엔 다시 찾아오지 않았죠. 어느 날 연주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집안이 엉망이 되어 있었어요. 서랍 속은 엉망으로 뒤집혀 있고, 기타 줄은 끊어져서 너덜거리고 제 옷들은 옷장 속에서 걸어 나와 마구 널브러져 있었어요. 아내의 남보다 한 옥타브 높은 음성이 제 마음에 또 한 번 날카로운 바늘을 꽂더군요. “그 애는 당신 때문에 죽었어. 도대체 당신이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제가 정말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을까요? 바라만 본 것도 죄라면 저는 기꺼이 감옥으로 걸어 들어가 조용히 남은 생을 노래나 만들며 살고 싶었어요. 그 뒤로 우리 부부에게 행복은 없었어요. 아내는 눈만 뜨면 헤어지자고 했어요. 저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했죠.
그날 이후 우리 두 사람의 삶은 지옥이나 다름없었지만,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헤어지지 못한 채 십 년을 더 같이 살았어요. 인간은 왜 그렇게 미련할까요? 그때 우리는 헤어졌어야 했어요. 아내의 우울증은 점점 더 깊어갔어요, 어느 날은 면도칼로 손목을 그어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죠. 저는 무서웠어요. 나 때문에 한 여자가 그렇게 불행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그렇게 불행하다면 사랑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낫죠. 사랑이 뭔지 마흔이 훨씬 넘은 이 나이에도 잘 모르겠어요.
혹시 <스틸라이프>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지아장커賈樟柯 감독의 영화 <스틸라이프>는 댐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인 양쯔강의 풍경들을 정말 슬프고도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죠. 이혼한 뒤 저는 삼협댐 건설이 시작된 양쯔강 크루즈 여행을 혼자 했어요. 양쯔강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배 안에서 바라보며 저는 숨이 막혔어요. 예부터 해마다 물난리가 나면 주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떠돌거나 더 높은 곳으로 이사를 갔대요. 빈번한 홍수를 막기 위해 정부에서 계획한 댐 건설의 명분은 훌륭하지만, 대신 이 천 년의 역사가 매순간 물속에 잠겨가고 있었어요. 매순간 사라지는 슬픈 장소의 추억들이 내 아픈 상처들과 맞물려 조용히 떠내려가고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