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1
사랑이라고요? 듣기만 해도 신물이 나네요. 세상의 그 많은 여자들이 나만 보면 금방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고 황홀한 시절이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어요. 많으면 많고 적다면 적을 마흔다섯 해, 그동안 해본 그 많은 사랑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이 기분, 당신도 아시지요? 한때 저는 잘나가는 기타리스트였어요.
비록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제가 빠지면 그때는 꽤나 유명했던 그룹 보컬 사운드가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까요. 계집애들은 제가 기타만 치면 죄다 홀린 얼굴로 “한번만 안아주세요” 뭐 그런 표정을 짓곤 했었죠. 다 옛날 얘기죠. 그렇게 인기 좋던 시절, 한 소녀가 연주할 때마다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곤 했어요. 한 일 년 가까이 저는 그 소녀의 편지를 받기만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타나지 않는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져서 죽을 지경이었죠. 아주 오랜만에 나타난 그 소녀는 제게 안개꽃 한 다발과 함께 쪽지 한 장을 남겼어요. 압구정동에 있는 어느 찻집에서 몇 날 몇 시에 만나자는 내용이 적혀 있는 쪽지를요.
오후 2시, 그 찻집에 도착했을 때, 저는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어요. 무대에서 기타를 치는 뻔뻔한 가슴도 못 말리는 두근거림이었죠. 찻집 안에 들어섰을 때, 꽃다발을 제게 안겨주던 그 소녀는 보이지 않았어요. 대신 그녀를 닮은 어느 여인이 저를 향해 수줍게 웃고 있었죠. 알고 보니 그녀는 제게 꽃다발을 안겨주던 소녀의 언니더라고요.
물론 그동안 받은 백 통도 넘는 편지는 소녀의 언니가 쓴 거였지요. 사람 마음 참 이상하죠? 소녀의 언니는 소녀보다 더 예뻤지만, 제기 반한 그 편지들의 문장들이 다 언니가 쓴 것임을 알면서도 저는 그 소녀가 참 보고 싶었어요. 어쨌든 우리는 데이트를 시작했어요. 꽃샘추위였지만, 그래도 봄이었고, 우린 참 행복했어요. 사실 저는 기타리스트가 아니라 발레리노가 되고 싶었어요. 아니 지금도 저는 기타를 치는 일이나 춤을 추는 일이 다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타를 치면서도 눈을 감으면 어느새 저는 춤을 추고 있었죠.
백조의 호수를 남자들이 추는 춤을 보셨어요? 정말 멋지죠. 지금도 저는 꿈속에서 하얀 발레복을 입고 백조의 호수를 향해 날아가네요. 어쨌든 저는 꽃다발을 제게 안겨주던 소녀의 모습과 편지를 쓴 소녀 언니의 마음을 둘 다 사랑했나 봐요. 왜 우리는 한 사람만 사랑해야 될까요? 두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를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녀들은 제게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데요. 제가 그 소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건 그해 여름 우리 보컬의 콘서트 때였어요. 제가 가수도 아니고 기타만 치는데, 어떻게 제 소리를 알아보고 꽃다발을 내미는지 저는 그 소녀가 정말 신기해서 죽을 지경이었죠. 그건 그 언니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치는 기타소리를 알아듣고 편지를 쓰는 여자, 정말 그녀들은 제게 한 사람이었어요. 아마 제 얼굴이 잘생겨서 일까요? 요즘으로 치면 꽃미남 스타일이던 저는 정말 여자들에게 인기가 짱이었죠. 여자의 마음은 참 이상해요. 내가 좋아서 죽을 것 같다는 그 여자가 내 얼굴만 보면 싫어서 죽을 것 같은 여자로 변하는지. 저는 정말 알 수 없어요.
콘서트가 끝난 뒤, 언니와 함께 나란히 서서 수줍은 얼굴로 꽃다발을 내미는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어요. 그녀의 짧은 단발머리는 웨이브가 진 긴 머리로 변해있었죠. 자매가 함께 있으면 눈이 부셨어요. 아-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고, 처참하게 가슴 아픈 거지 같은 사랑. 낙엽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던 그해 가을, 결혼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자 왜 그렇게 가슴 한편이 휑하게 비어오는지 제 마음을 알 수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신부가 될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이제는 처제가 될 소녀의 얼굴은 왠지 슬퍼 보였어요. 그녀의 슬픔이 턱시도를 입은 내 가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걸 느끼며, 저는 그녀 아닌 다른 사람의 남편이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