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입술 9회 (최종회)
밸런타인데이가 돌아왔습니다. 저는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 한 상자를 사서 혼자 먹습니다.
라디오에서 이런 이야기가 흘러나오네요. 뉴욕주 브롱스 동물원에서 인상적인 밸런타인데이행사가 벌어졌답니다. 바퀴벌레 오만 팔천 마리에다 연인의 이름을 새겨주는 이색 행사였대요. 초콜릿도 녹고 장미꽃도 시드니, 영원한 건 바퀴벌레밖에 없다는 콘셉트에서 비롯된 행사라고 해요. 초콜릿은 녹아야 제맛이고 장미꽃은 시들어야 제맛이지 바퀴벌레처럼 영원해서 또 뭐하겠어요? 초콜릿 백만 상자보다 장미꽃 백만 송이보다 바퀴벌레 오만 팔천 마리보다 훨씬 더 길고 영원할,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오늘도 저 무심한 강물 따라 흘러만 갑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탈레반은 국경없는의사회 봉사단원들이 아프간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러 온 선교사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해요.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아프간 탈레반 대변인 ‘자비훌라 무자헤드’는 “어제 오전 8시쯤 우리 순찰대가 스파이 활동을 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발견해 모두 사살했다”라고 AP통신에 밝혔답니다.
탈레반은 ‘리틀’ 씨와 그 일행을 ‘성경을 들고 다니는 스파이’라고 규정하고, 스파이에게 합당한 처벌은 죽음뿐이라고 주장했대요. 하지만 리틀 씨 일행은 아프간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답니다. 40년간 가난하고 병든 자기네 아프간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의사에게 총을 겨눈, 아니 사랑하는 당신에게 총을 겨눈 그들을 정말 용서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겠지요.
“마리아 자매님, 그들의 오래된 아픔을 우리는 모르잖아요. 용서하세요.”
전쟁은 어디서나 무자비합니다.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해대는 이 무자비한 전쟁의 역사가 바로 인류의 역사이지요. 어쩌면 신은 무섭고도 위대한 힘을 지닌 자연입니다. 우리에게 물과 공기와 일용할 식량을 주시는 고마운 분도 자연이고, 지진과 홍수와 가뭄과 쓰나미를 내려주시는 무서운 분도 하늘이십니다. 어쩌면 예수와 부처와 마호메트는 그 무서운 하늘을 향해 이 불쌍한 중생들을 구하기 위한 기도를 그치지 않았던, 한없이 아름다운 예외적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인간들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며 어제도 오늘도 전쟁을 해댑니다. 아- 아름다운 당신,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신은 더 이상 제게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야- 빨간 입술, 꺼져버려-” 하면서 우리 집 대문을 발길질을 해대던 사이코 부부도, 밤에 빨간 불을 켜고 벌거벗은 채,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를 바라보던 골프 치는 변태도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저는 입술을 빨갛게 바르고 길을 나섭니다.
당신의 유품은 아주 천천히 제게 도착했습니다. 표지가 너덜너덜한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와 오래전에 제가 보낸 편지 몇 통, 단 한 번도 답장을 주지 않던 당신이 제 편지를 오래도록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꿈속에서 벌거벗은 채 거리에 서 있던 제게 입혀준 그 사제복 한 벌, 그게 다였습니다.
저는 당신의 사제복을 깨끗이 세탁해서 벽장 속에 걸어두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꿈속에 찾아오면 아무 때라도 입혀드리려고요. 하지만 당신은 그 후로도 오래도록 제 꿈속으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