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입술 8회
불행한 일들에 아무런 손을 쓸 수도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들은 더디게 더디게 흘러갑니다. 아직도 흰 눈은 듬성듬성 세상의 차가운 땅들을 덮어주고 있고, 창밖에는 경찰차들이 동네를 에워싸고 있었어요. 아마도 ‘골프 치는 변태’ 아내의 자살사건 때문이려니 했었지요. 한번도 사랑해본 적 없는 나의 이웃들마저 그리워지는 고독한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라디오에 귀를 세우며 세상의 뉴스들을 수신하고 있던 제 귀에 들려온 건 청천벽력 같은 어처구니없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의 마약 조직패들이 몽땅 검거되었다는 내용이었어요. 가만히 들어보니 상습적으로 코카인과 헤로인 복용을 해온 우리 동네 사람들의 이름들 중 낯익은 이름은 바로 ‘골프 치는 변태’와 ‘사이코부부’와 ‘조폭할머니’ 등등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조폭할머니는 마약을 동네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대주는 조직 배급책이었다고 하네요. 이 잔혹동화 같은 이야기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꿈속에서 사랑하는 당신이 저를 위해 늘 기도하신다는 그 말이 현실처럼 다가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시고…”
숨조차 쉴 수 없는 밤들이 지나가고, 깜깜한 세상에 갑자기 환한 불이 들어오듯 오빠로부터 메일이 왔어요. “사랑하는 마리아, 많이 놀랐을 텐데, 이제야 소식 전한다. 그동안 전화도 컴퓨터도 모든 통신이 엉망이 되었단다.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며칠 전 불행한 사고를 당한 분들 중 한국 분 하나가 계셨단다. 그분은 의사가 아니라 한국에서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신부님이셨어. 마침내 숙소에서 나와 함께 한 달째 지내고 계셨단다. 그날 마침 감기를 심하게 앓던 나 대신 일행을 따라나섰다가 큰일을 당하셨어. 죄송하고 침통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구나. 그런데 그분이 마리아 너를 잘 알고 계시더구나. 네가 다니는 성당에 계셨던 적이 있었나본데, 마리아 네 예기를 자주 하셨어. 그렇게 입술을 새빨갛게 바르고도 그렇게 천사같이 순결해 보이는 여자는 세상에 마리아 자매님밖에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할 땐 신부님 눈에서 빛이 났단다. 한 짐도 안 되는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나오더구나. 네 이름이 씌어 있는 걸 보니 네가 드린 모양인데, 그게 아버지가 갖고 계시던 그 책 맞지? 유품이라야 별것도 없지만, 네게는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인편에 보낸다. 이 슬픈 마음을 나눌 사람이 바로 너인 것 같은데, 곁에 없어서 정말 아쉽구나.”
슬픔은 얼어붙은 강물처럼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출구 없는 슬픔은 벽이 되어 저를 에워쌉니다. 이 조용한 동네의 괴상한 이웃들과의 오랜 지루한 싸움으로부터 결국 제가 이긴 걸까요? 아니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늘에 계신 사랑하는 당신은 말씀하십니다.
“마리아 자매님, 그들이 어쩌다 마약 중독자가 되었는지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모르잖아요. 세상의 모든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열악한 아프간에 정착하여 아프간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려 애쓰던 의사들을 살해한, 아니 사랑하는 당신을 살해한 탈레반 일행들도 용서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당신은 말씀하십니다. “그럼요. 사랑하는 마리아 자매님, 용서해야 하고 말고요.”
용서란 무엇일까? 저는 밤새 잠 못 이루며 용서에 관해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서는 그저 생각일 뿐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신은 이제 제게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저는 정말 오랜만에 기도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