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입술 6회
폭설이 왔습니다. 방학을 했고, 겉으로는 늘 그렇듯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나날들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하얀 눈이 쌓인 창밖을 내다보니 갑자기 바깥세상이 소란합니다. 경찰차가 와 있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걸 보니 무슨 일인가 났나 봅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밖으로 나가 ‘골프 치는 변태’네 집 앞에 모여 있는 구경꾼들 중 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 났느냐고 물어보았어요. 그 집 부인이 오늘 새벽 목매달아 자살을 했다는군요.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들어맞아 갑자기 머리에 벼락을 맞은 기분입니다. 이 죄책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그녀를 살릴 수 있었다.” 그런 목소리가 제 몸 깊은 곳에서 울려오고 있었어요. 사랑하는 당신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옵니다. “마리아 자매님 그건 자매님의 잘못이 아니어요. 우리 그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합시다. 아멘.”
잎 새가 다 떨어진 강가의 겨울나무들 위로 하얀 가루 같은 눈발이 사르르 내려앉습니다.
문득 아주 옛날 아버지가 그리신 눈 오는 날의 풍경화가 생각납니다. 단칸방에서 세 식구가 같이 살 때도 그 그림은 늘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배고프고 추운 날에도 오빠와 나는 그 그림을 보며 위안을 받곤 했답니다. 그림이란 참 신기한 물건입니다. 그림을 그린 누군가가 이 세상을 떠나가도 그림은 그대로 벽에 걸려 영원히 자신의 생명을 이어갑니다. 우리 아버지는 화가가 되고 싶으셨던 분이랍니다. 어릴 적엔 고향인 신의주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신동으로 유명했다고 해요. 우리 아버지는 전람회를 다니는 걸 좋아하셨어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시다가 빚더미 위에 앉은 뒤, 아버지는 책 외판원을 하시면서도 늘 전람회를 보러 다니셨어요. 평생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 한 열 점쯤 되어요. 그중에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그림은 국군이셨던 큰아버지가 육이오 때 압록강으로 북진해서 태극기를 꽂는 모습이랍니다. 놔둘 때가 없어 아버지 친구 댁에 맡겨놓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찾으러 가니 그 집에 불이 나서 그림이 다 타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오빠와 나는 한동안 슬픈 기분에 사로잡혀, 단 한 점 남은 그 눈 오는 날의 풍경화를 보고 또 보고 했더랍니다. 오빠는 아프리카로 떠나갈 때 가방 속에 그 그림을 넣어갔어요. 오늘 갑자기 그 그림이 그리워집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오면서 엉뚱하게도 제 머릿속에는 우리 가족의 멀고도 먼 슬픈 옛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아버지가 꺼내 보여주시던 큰아버지의 초상이 떠오릅니다. 나이 차이가 많아 어려서부터 아버지처럼 든든한 형님이셨다는 큰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학교에서 한국말을 한다는 죄로 퇴학을 당하게 되었답니다. 퇴학을 당하지 않는 조건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소년 항공학교에 입학하셨대요. 이차대전 당시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탄생시킨 유명한 학교이지요. 그때 큰아버지 나이 열여섯 살이었답니다. 큰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죄책감으로 대대로 만석꾼 집안의 장손이던 할아버지는 술로 지새다가 다음 해에 돌아가셨대요. 큰아버지가 가미가제 특공대로 출전하기 하루 전 날, 일본이 전쟁에 패전하는 바람에 큰아버지와 같은 특공대 동기들은 모두 집단 자살했답니다. 일본인이 아닌 큰아버지는 몰래 도망을 쳤다가 고향인 신의주로 돌아오셨대요. 아버지는 평생 그날의 기쁨을 잊지 못하셨어요. 아버지는 어릴 적에 대구로 피난을 오신 까닭에 경상도 사투리를 쓰셨어요. 하지만 말 속에 가끔 섞이는 이북 사투리가 저는 참 듣기 좋았답니다.
큰아버지는 최연소 소위로 육군사관학교에 입대해서, 1948년 제주도에 4·3사태가 나자 중위로 발탁되어 중대병력을 끌고 제주도를 평정하러 내려가셨어요. 그 시절의 제주도는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내가 죽든지 상대를 죽이든지 해야만 할 정도로 잔인했다고 합니다. 민간인 학살에 앞장선 게 육군과 경찰이라고들 알고 있지만, 곳곳에 지주들을 굴비 두름처럼 쇠꼬챙이에 꾀어 묶어놓은 풍경은 다반사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는 식으로 서로 죽이고 죽었으니 어느 쪽이 더 나쁘고 덜 나쁜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고 해요. 그저 매일 다 죽이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아니면 제주도가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고 하더랍니다. 마치 베트남전쟁과 비슷한 양상이었겠지요.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여야 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너무 어린 나이에 체험한 큰아버지는 사람을 많이 죽인 날은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새며 괴로워했답니다. 그러던 중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아편 장사를 하던 사람이 참모로 오는 바람에 큰아버지는 사람을 많이 죽인 괴로운 날엔 아편 주사를 맞고 잠들었다고 해요.
육이오가 발발하고 계엄이 선포되자 큰아버지는 본대에 합류하여 북진을 시작합니다, 제5군단 육군 중령으로 자기 고향인 신의주의 계엄사령관이 되어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압록강까지 올라간 큰아버지 부대는 인민군 패잔병들에게 기관총 공격을 받고 모두 전사, 큰아버지만 기관총 두 방을 맞고 살아남아 대구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큰아버지는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에서도, 육이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상처의 고통이 큰 탓에 다시 아편을 복용하다가 치유할 수 없는 아편 중독자가 되셨답니다. 불명예제대를 한 큰아버지는 그 후 세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해요. 아버지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소주 한 병을 드시며 마치 처음 하는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긴긴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특히 압록강에 도달한 의기양양한 큰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할 때는 마치 눈에 본 것처럼 생생했어요. 아마도 아버지는 그렇게 씩씩한 큰아버지의 모습을 눈에 보이듯 그려낸 것이겠지요.
며칠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며칠째 저는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눈만 감으면 아버지가 그린 눈 오는 날의 풍경화가 떠올랐어요. 얼어붙은 하얀 강물 위로 저녁이 내려앉습니다.
폭설 때문에 교통이 차단된 듯, 세상은 고요합니다. 경찰들과 구경꾼들로 웅성거리던 ‘골프 치는 변태’네 집도 며칠째 고요합니다. 갑자기 ‘사이코부부’가 우리 집 대문을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르는군요. “빨간 입술 다 너 때문이야. 꺼져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