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입술 5회
요즘은 왜 그렇게 꿈을 자주 꾸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뒤숭숭한 나의 이웃들 때문이겠지요. 이 기분 나쁜 기억도 분명 꿈이겠지요? 빨간색 커튼이 마구 휘날리는데, 아마도 창문이 열려 있는가 봐요. 잠을 자는 내 눈앞에 어떤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골프 치는 변태’의 아내였어요. 하루가 멀다고 골프채로 맞고 산다고 소문이 난 그녀가 시퍼렇게 멍이 든 눈으로 잠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마리아, 제 세례명은 ‘안나’입니다. 남편이 당신을 괴롭힌다는 걸 알고 있어요. 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남편 탓이 아니에요. 결혼 한 그날부터 우리 부부는 불행했어요. 제가 불감증이었을까요? 어쨌든 남편의 손이 내 몸에 닿으면 마치 뱀이 몸에 닿는 것처럼 시퍼렇게 소름이 돋았어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저는 매일 밤이 오는 게 무서웠어요. 그때부터 남편은 골프채로 저를 때리기 시작했어요. 맞는 것에 이력이 난 저는 맞으면서 사는 일에 익숙해졌어요. 저를 실컷 후려패고 난 다음 날 아침이면 남편은 맘대로 쓰라며 신용카드를 던져주곤 헸어요. 카드로 차를 사든 루비반지를 사든 밍크코트 몇 벌을 사든 남편은 개의치 않았어요. 저는 매를 맞고 그는 매 값을 치르며 그렇게 우리 부부는 이십여 년을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 당신이 이사를 온 거예요.
제발 부탁이에요, 제 남편과 딱 한 번만이라도 같이 자주세요, 저를 살려주는 셈 치고요.
남편은 빨간 입술과 한 번 하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면서 골프채로 저를 때려요.’
그렇게 그녀는 누워있는 제 손을 잡고 한참을 울다가 돌아갔어요. 이게 만일 꿈이라면 무슨 꿈이 이리도 모질까요? 꿈속에서 벌거벗은 저를 위해 사제복을 벗어준 사랑하는 당신, 당신은 이 세상의 옳은 일이 무엇이고 그른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당신의 기도 소리가 멀리서 들려옵니다. “사랑하는 마리아. 언제나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다음날 저는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눈두덩에 시퍼렇게 멍이 든 ‘골프 치는 변태’의 아내가 2층 창문에 기대서 애원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걸 보았어요. 그녀의 눈빛은 “살려주세요” 그렇게 외치는 듯했어요. 출근을 하는 제 등 뒤에서 ‘골프 치는 변태’가 골프공을 아프게 날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뒤로 하고 저는 가벼우면서도 소중한 일상을 시작합니다.
우리 학급에도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세 명이나 있어요. 저는 이 아이들을 위해 도시락을 매일 싸갑니다. 제 것까지 매일 네 개의 도시락을 싸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행복한 일이랍니다. 그것도 다른 아이들 몰래 도시락을 전해줘야 하거든요. 초등학교 시절 자주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던 우리 남매는 배가 고프다는 일이 결코 부끄럽지 않았답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난해도 결코 기죽지 않는 씩씩한 유전자를 물려주셨어요. 게다가 우리는 아주 예전엔 부자였으니까, 걸어도 걸어도 다 우리 할아버지 땅이었다니까, 가난한 사람의 심정을 좀 느껴보라고 하느님이 가난한 세상에 여행을 보낸 거라고, 어린 오빠는 제 손을 잡고 말하곤 했어요. 부자가 되어서도 겸허한 사람, 가난해도 비굴하거나 비뚤어지거나 염치없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 남매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하느님은 아시겠지요? 오늘은 아프리카에서 아프간으로 어린아이들을 치료하러 떠난 오빠한테서 긴 이메일이 왔어요.
“사랑하는 내 동생 마리아.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곳 아프간에서는 접종 한 번이면 영구적으로 막을 수 있는 소아마비를 아직도 많은 어린아이들이 앓고 있단다. 하지만 아프간 사람들 사이에는 이슬람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어서, 백신 접종 활동이 쉽지가 않아. 게다가 매 순간 탈레반의 위협으로 우리는 위험 속에서 아이들에게 백신 접종을 하고 있는 셈이지.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기분으로 하루하루에 임한단다. 언젠가는 이 세상에 사랑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하지만 그렇지 못한다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살 만한 것 같아. 이곳에서 뵌 미국인 안과 의사 한 분은 40년간 아프간에 살면서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며 환자들을 진료해온 훌륭한 분이란다. 나 같은 사람은 발을 벗고도 따라가지 못하지. 그분은 아프간 구호단체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대부로 불린단다. 그분 외에도 너무도 훌륭한 미국인 치과 의사 한 분이 계셔. 그분은 치과 장비를 야크에 매달고 에베레스트 산 중턱까지 올라가 환자를 치료하시곤 해. 눈만 빠끔 내놓은 채 시커먼 부르카를 둘러쓴 여인들의 이를 치료하기 위해 다른 가족들과 협상하는 법도 배우신 훌륭한 분이지. 이가 아파도 치료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평생을 고통에 허덕이며 겨우 아편을 먹고 치통을 잠재울 수 있었던 아프간 사람들에게 그분은 하느님 같은 존재야. 그전까지 치통은 이들에게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다는 걸, 믿을 수 있겠니? 이렇게 훌륭한 분들과 같이 일한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단다. 소아마비 백신을 접종하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받고 돌아가기 일쑤인 나 같이 보잘것없는 의사를 이분들은 친아들처럼 여겨주셔. 사랑하는 마리아, 언제나 이 오빠가 너를 위해 기도한다는 걸 잊지 말기를- 안녕.”
저도 오빠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나의 형제임이 자랑스럽습니다.
요즘은 해가 너무 빨리 집니다. 어둑해지자 사이코 부부가 집에서 나와 또 우리 집 대문을 한 번 세게 발길질을 하고 갑니다. 어쩌면 저의 인내심을 시험해보는 걸까요?
마치 심심하면 남한에 포격을 해대는 짓궂은 이웃 북한을 닮았습니다.
어디선가 하느님이 제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조용히 속삭이십니다.
바람 불고 비 오는 겨울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