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입술 1회
제 이름은 ‘빨간 입술’입니다. 이 한적한 우리 동네에서 그렇게 불리고 있으니까요.
아마 제가 늘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큰 집에 혼자 사는 여자가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남자를 유혹하기라도 하려나 보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말 오해예요. 제가 워낙 빨간색을 좋아하는데다가,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좋으라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답니다. 저는 가끔 지붕 위에 올라가 헤일 수도 없이 많은 밤하늘의 별을 셉니다.
얼마나 적막한지, 북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우리 집 이 층에서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옆집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소리들이 들립니다. 웃는 소리, 우는 소리, 싸우는 소리, 때로는 남편에게 얻어맞는 아내의 신음소리도 들립니다. 제가 이곳으로 이사 온 건 8년 전입니다.
누군가 팔려고 내놓은 채 빈집으로 낡아간 이 집은 그땐 정말 폐가에 가까웠습니다.
집주인이 빚도 많은데다 이민을 가는 바람에 정말 싼 값으로 구입을 하긴 했지만, 그곳에서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제 꿈은 아주 어릴 적부터 강물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가에서 사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싼 값으로 살 수 있는, 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집은 이 세상에 그 집밖에는 없을 것 같았어요. 그 폐가를 지금의 아름다운 집으로 꾸미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답니다. 지금의 우리 집을 와 본 사람은 아마 제가 상속을 받은 부잣집 딸이거나 위자료라도 듬뿍 받은 이혼녀쯤으로 생각한답니다.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결혼을 한 번 하긴 했었어요. 아주 오래전 일이라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남편이라는 작자가 위자료는커녕 편지 한 장 없이 미국으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혼자서 이혼 수속을 하느라 애를 먹었답니다.
상대도 없이 혼자 이혼 수속을 밟는 일은 굉장히 외로운 일이지요. 상대도 없이 링 위에서 싸우는 복서처럼요, 하긴 이미 와버린 이별인데 아무러면 어떻겠어요?
하지만 그 짧은 결혼은 제 생애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어요. 대학을 졸업한 이후 초등학교 미술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이 집을 샀답니다.
집주인인 제 정체에 관해 이웃 사람들은 지금도 수군거리는 걸요. 돈 많은 사람의 첩인 건 아닌지. 복권 당첨이라도 됐는지. 몇 년 사이 부쩍 땅값이 올랐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대견하기 짝이 없는 우리 집이지만, 사실 8년 동안 이 적막한 큰 집에 혼자 사는 건 쉽지 않았어요, 그때는 이 동네에 우리 집까지 딱 네 가구가 살고 있었답니다.
이사 온 지 며칠 뒤인가 옆집 주인 남자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려 열어주었어요, 그는 집 안을 죽 훑어보더니 좋은 이웃이 되자고 말하면서 의자에 앉더군요, 그러더니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숨소리가 약간 거칠어지는 듯했어요. 아무 말 없이 그는 제가 내온 주스를 들이켜고는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예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한 제가 일어서며 제가 좀 바빠서 그러니 돌아가 주십사 했지요. 그런데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 거예요. 다행히도 그때 전화벨이 울렸어요. 친언니처럼 지내는 수녀님이 오늘 하루 제 안부를 묻는 전화였어요. 옆집 남자는 그 커다란 덩치를 흔들거리며 일어서서는 내일도 와도 되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저는 내일은 바빠서 집에 없다고 대답했죠. 그리고 다음 날, 전날과 같은 시간에 그는 또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렸어요. 집에 없는 척하면서 저는 조용히 숨어 있었답니다.
그리고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는 같은 시간에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렸어요. 때는 마침 방학이라 저는 그해 여름 내내 집에 숨어 있었답니다. 일주일이 그렇게 지나자 그는 더 이상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지 않았어요. 그 대신 그는 자기 집 마당에 만들어놓은 골프 연습장에서 우리 집 쪽을 향해 골프공을 날리기 시작했어요. 얕은 담 너머로 제 모습이 보이기만 하면 그는 골프공을 날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그냥 우연이려니 했지만 이내 저는 깨달았어요. 그가 저를 향해 골프공을 날린다는 걸.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골프공을 날리기도 했어요. 저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골프공이 제 몸에 와서 부딪히는 아픔을 느꼈답니다.
곧 저녁이 오고, 또 다른 이웃이 활동하는 시간이 돌아왔어요. 얼굴이 창백한 서른 갓 넘은 여자와 그의 남편은 하루 종일 바깥에 나오지를 않아요, 해가 지고 어둑해지면 그들은 문밖을 나와 동네를 어슬렁거린답니다. 어느 날 저는 제 귀를 의심했어요. 낄낄거리며 우리 집 대문을 발로 차면서 그들 부부가 커다란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야- 빨간 입술, 빨갛게 입술을 바르고 대문을 빨갛게 칠하면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어디 두고 보자고. 얼마나 더 버티는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을 용서해야 할지 말지 저는 매일 밤 고민했답니다.
그렇게 밤이 오고, 저는 집안 구석구석에 모셔놓은 성모상들을 바라보며 편안한 잠이 들기를 성모님께 기도했어요. 하지만 꿈속에서도 옆집 남자가 골프공을 날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고, 제 몸에는 골프공으로 맞은 상처 자욱이 시퍼런 멍으로 맺혀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제 몸을 살펴보니 아무런 상처도 없는데, 어느 게 꿈이고 어느 게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그해 여름이었어요, 하느님은 저를 많이 사랑하시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저는 헤일 수 없이 많은 밤하늘의 별들에게 말했어요. 그 중의 먼 별 하나가 이렇게 속삭이는 밤이었어요. “Don't Worry, Be Hap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