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마지막 남자 7회
드디어 나는 산토리니 섬에 도착했다. 유람선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타고 피라 마을에 올라 다시 버스를 타고 한없이 구불거리는 높은 언덕을 올라갔다. 바다를 끼고 올라가는 섬의 풍경은 척박하고 한없이 넓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나타나는 이아 마을의 그림 같은 풍경은 꿈속에서 본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집들을 지었을까?
나는 수없는 계단들을 오르고 올라 마을의 꼭대기에 올랐다. 영화 속에서, 꿈속에서 본 까만 옷을 입은 그리스 섬 할머니들은 이제 다 돌아가시고 한 분도 남지 않은 듯했다. 마을은 기념품 가게들과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골목골목마다 미로로 이어진 이아마을의 골목길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또 나는 사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고향을 떠나 배를 타고 낯선 나라들을 떠도는 고기잡이 선장을. 그리고 드디어는 이 아름다운 섬마을에서 낯선 이국 여인과 짧은 사랑에 빠지는 쓸쓸한 남자의 마음을.
나는 마을의 꼭대기 어느 카페에 앉아 일몰을 기다렸다. 이제는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한 상업화된 곳이라 해도 산토리니의 일몰을 보지 않고 죽는 사람은 애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고 쓸쓸하게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순간 엉뚱하게도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가 떠올랐다. 너무 흔해져서 존엄성을 상실한 그 시의 모든 구절들이 문득 엄마의 생애를 이야기해주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알게 되었던 시, 「목마와 숙녀」의 전문을 또박또박 기억해내려 애썼다. 시가 시간인 동시에 공간이라면, 그 시의 골목골목마다 다 들어가 본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와인이 몇 잔 들어가면 엄마는 가끔 이 시를 낭송하곤 했다.
너무 낯익어서 통속하게 느껴지는, 그저 이국정서가 배어 있는 낭만주의 시로만 알았던 그 시의 밑바탕에 깔린 삶의 쓸쓸함에 관한 정의를 나는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엄마의 낭랑했던 목소리를 기억하며 나는 와인 한 병을 시켜 마셨다.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일몰을 바라보며 나는 그냥 바다에 빠져 죽고 싶었다. 갑자기 나는 엄마를, 버지니아 울프를 생각했다. 그녀들의 지독한 우울증을. 강물에 뛰어들어 삶을 끝장낸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평생의 좋은 반려였던 남편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집어넣은 채 물속으로 잠겨간, 이야기로만 들은 전설적 인물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리며 나는 한 잔 두 잔, 석 잔째의 와인을 마셨다. 그 얼굴에 엄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술을 마셔 몽롱한 의식 속으로 엄마가 아저씨에게 보냈던 편지 중에 씌어 있던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 떠올랐다. 술을 마시면 기억력이 흐려진다거나 필름이 끊긴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거짓말이다. 적당한 용량의 알코올은 지난 삶의 기억들의 골목길마다 환한 등을 밝힌다. 그 또렷한 의식을 붙들고 술은 우리를 단호하게 만든다.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도 주저하지 않는 단호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술을 잔뜩 마시고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져죽거나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거나, 그동안의 삶을 다 토해낸 뒤 다시 살아보기로 결정한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나 이 세상 하나밖에 없는 다정한 어머니도 가끔 멀리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당신은 한 번도 싫은 적이 없습니다. 어떤 옷에도 잘 어울리는 벨트나 예쁜 색깔의 매니큐어까지도 몇 번 쓰고 나면 바꾸고 싶지만 당신에 대한 마음은 아직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새로 산 드레스도 새로 사온 초콜릿도 며칠만 지나면 곧 싫증 나는데 당신은 아직 한 번도 싫증 난 적이 없습니다. 오래 숙성된 포도주나 그레이프 디저트도 매일 먹으면 물리는데 당신은 매일매일 같이 있고 싶습니다.”
훔쳐본 엄마의 편지 속에 숨어 있던 이렇게 달콤한 말들이 버지니아 울프의 글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었다. 엄마에게도 버지니아 울프에게도, 외로웠던 어린 시절과 전쟁의 검은 그림자가 평생을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참 좋은 남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게 그들의 공통점이다. 나는 거기까지만 기억하고 싶었다. 산토리니의 일몰은 서서히 어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