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마지막 남자 6회
섬으로 가는 유람선을 타려면 우선 비행기를 타야 했다. 오랜만에 탄 비행기 속에서 나는 소름 끼치는 고독을 느꼈다. 마치 어릴 적에 믿을 곳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되었던 기분과 비슷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늘 남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의 연인과 그의 아내는 마치 내가 꾸며낸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엄마와 아저씨와 함께했던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 자꾸만 앞으로 되돌아가는 필름처럼 반복해서 떠올랐다. 아저씨는 어디에 있을까? 엄마 말처럼 정말 병들고 나이 든 여인을 돌보고 있을까?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어쩌면 엄마의 병든 마음 때문에 그는 오래도록 엄마 곁을 떠나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끝까지 하지 않을 거라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걸 나는 깨달아가고 있었다. 세상의 밑도 끝도 없는 길고양이들을 돌보는 일도,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내 연인의 아픈 아내를 돌보는 일도, 오래전 아저씨가 엄마의 우울증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일도.
그 일을 끝까지 아무 소리 없이 지켜낸 사람은 오갈 데 없는 나를 거두어준 엄마였다. 실핏줄 하나 섞이지 않은 고마운 엄마를 위해 평생 내가 한 일이라곤 문상을 오는 사람들을 위해 상주 노릇을 했던 것, 그것뿐이었다. 사람들은 바로 그 순간을 위해서 자식을 필요로 한다. 살아 있을 때뿐 아니라 죽어서도 사람들은 남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을 위한 마지막 잔치이기 때문에라도 더욱 그럴지 몰랐다. 나는 부조 돈을 들고 온 사람들 모두에게 연필로 긴 답장을 써서 보냈다. 내가 엄마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모두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고 싶었다. 그녀가 죽어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진작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면 지금 내 마음이 이렇게 괴롭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들 사이로 나는 꿈에도 그리던 그리스 땅을 밟았다. 아테네는 지루한 도시였다.
무너진 신전의 돌 더미들로 남은 화려했던 문명의 흔적들을 상품으로 하루하루 벌어 먹고사는 가난한 도시 아테네의 불빛은 마치 몰락 귀족의 초라한 얼굴처럼 창백했다. 도시 한복판에 닳고 닳은 피곤한 낯빛으로 버티고 서 있는 아크로폴리스에 올라 나는 결국 엄마의 마지막 남자가 되고만 아저씨를 생각했다.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마술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던 그의 따뜻한 마음씨가 겨울날 주머니 속에 들어온 그리운 타인의 손처럼,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의 얼굴처럼 생생했다. 여행은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내 인생의 시간들을 맘대로 배치해 보기 시작한다. 엄마와 아저씨와 나, 세 사람은 나무랄 데 없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사라진다.
아저씨와 나는 엄마를 찾으러 온 세상을 뒤지며 돌아다닌다. 엄마는 어디에도 없고,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 그리스 산토리니 섬에 정착해 갤러리를 열고 둘이 살기로 한다.
아저씨는 집을 꾸미고 그림을 그리며, 나는 섬에 가득한 고양이들을 돌보며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낸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가 나이 차가 좀 나는 부부라고 생각한다. 아니 동양인들의 나이를 가늠할지 모르는 그들은 그냥 당연히 우리를 부부라고 생각한다.
아저씨의 그림은 관광객들에게 점점 인기가 높아져, 파리나 베를린으로 가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우리는 그림을 판 돈으로 엄마를 찾으러 세상 모든 곳을 행해 떠난다.
터키로 인도로 에스토니아로 러시아로 우리가 엄마를 찾으러 가보지 않은 곳은 달나라 말고는 아무 데도 없다. 어느 날 우리는 달나라로 엄마를 찾으러 가기로 결정한다.
달나라로 가는 우주선의 비용은 무척 비싸다. 우리는 갤러리를 판 돈으로 달나라를 향한 우주선에 오른다. 달나라는 너무 멀 것 같지만 생각밖에 얼마 걸리지 않는다. 달에 도착한 우리는 달나라에도 엄마가 없다는 걸 안다. 엄마는 어디에 있을까?
달나라에서 아저씨와 나는 갤러리를 연다. 달나라 최초의 갤러리이다. 우리는 아저씨가 그린 그림을 갤러리에 걸어놓고 관광객을 받는다. 언젠가 엄마가 올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이라도 좋았다. 아니 어쩌면 맘 깊은 곳에서는 나는 엄마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사랑한 내 인생의 마지막 남자는 어쩌면 아저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 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엄마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그렇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음을 나는 이미 아주 어릴 적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닌가 보았다. 잠 못 이루는 아테네의 밤은 그렇게 시들어가고, 나는 이른 아침 산토리니로 가는 호화 유람선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