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마지막 남자 5회
귀가 닳도록 들은 그리스 섬들의 풍경은 가끔 내 꿈속에 나타났다.
꿈속의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낯익은 푸른 지붕과 하얀 집들의 마을, 남편은 늘 산토리니 섬의 이아마을로 두 번째 신혼여행을 가자고 말하곤 했다. 지금의 애인도 그랬다.
하지만 언제?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와 함께 먼 곳으로 떠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오랫동안 떠나있으면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식물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녀처럼 또 하나의 조그만 식물을 닮은 엄마 걱정은 하지 않았을까?
어느 날 꿈속에서 나는 그리스의 이름 모를 섬, 어느 오래된 수돗가에서 졸졸 떨어지는 수돗물을 검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온 기운을 다해 받아먹고 있는 풍경을 보았다. 온 세상의 물기가 다 말라버린 듯한 숨이 콱콱 막히는 한여름이었다. 어디선가 길고양이들이 조용히 나타났다가는 어느새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문득 성벽이 나타나고 그 길을 따라 걷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없는 길고양이들이 떼를 지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갖고 있던 빵부스러기들을 고양이 떼들에게 던졌다. 순간 고양이들의 세상은 빵부스러기를 먼저 먹으려고 덤비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변했다. 피 터지게 싸워대는 고양이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어느 날 여행길에서의 엄마처럼 빵 조각을 던진 걸 후회했다. 이 세상의 배고픈 고양이들을 다 구제할 수는 없는 거라고, 우리 아파트 단지의 고양이들도 다 구제하지 못하는 주제에 배고픈 세상의 모든 고양이들을 다 걱정하다니. 그 중의 한 마리를 닮은 나 자신, 오늘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음을 꿈속에서도 감사하면서 나는 섬의 낡은 계단들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올라가도 계단은 끝이 없었다. 계단을 오르고 오르다 나는 어느 파란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득 남자의 벌거벗은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곁에서 뚱뚱한 그리스 아줌마가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벗은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남자는 바로 아저씨였다. 그리고 감자 껍질을 벗기고 앉아 있는 아줌마는 그리스 전통의 검은 옷을 입은 뚱뚱한 우리 엄마였다. 왜 이들은 나를 피해 이곳에 숨어 있을까? 나는 눈물이 왈칵 치밀어 “아저씨-”하고 불렀다. 등을 벗은 남자는 흠칫 놀라 나를 바라보고는 눈물이 금방 떨어질 듯 슬픈 눈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불쌍한 것.”
왜 사람들은 그렇게 떠나는 것일까? 강의 물결을 따라 바다의 파도를 따라 그렇게 살지 못하고, 연어처럼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걸까? 연어처럼 책임감도 모성도 부성도 지니지 않으면서. 이 한여름 목마른 아파트의 고양이들은 어디서 물을 먹을까? 수돗가도 없는 아파트의 지하에서 물이라고는 내가 떠다 주는 양은 대야 속의 물이거나 빗물밖에는 먹을 물이 없을 텐데. 그나마 내가 떠다 놓은 양은 대야 속의 물을 볼 때마다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꿈속에서 새카만 옷으로 온몸을 휘두른 그리스의 할머니들이 내 곁을 지나갔다.
그 중 한 할머니가 내게 물었다. “아가- 어디 가니?”
꿈속에서 아저씨는 섬의 구석구석 어디에나 있었고, 또 어디에도 없었다. 때로 아저씨는 유람선의 선장이 되어 나타났고, 어릴 적에 본 영화 <희랍인 조르바>의 주인공 ‘안소니 퀸’이 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꿈속에서 아저씨는 영화 <희랍인 조르바> 속의 ‘안소니 퀸’의 대사와 똑같은 내용과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인이여- 불쌍한 피조물이여-”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꿈속에서도 병원에 누워있는 내 연인의 아내가 떠올랐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 손을 휘저으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내가 허공에 떠도는 그 손을 잡았을 때, 그 손의 주인은 그녀가 아니라 뚱뚱하고 아름다운 우리 엄마였다.
엄마가 죽었다. 청소하러 오는 아줌마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지 몇 시간이 지난 뒤였다. 사인은 심장마비였고, 무리한 다이어트가 문제가 된 것 같다고 주치의는 말했다.
엄마는 밥을 많이 먹지 않아도 살이 찌는 체질이었다. 저녁은 늘 간단한 샐러드와 와인 반병 정도로 끝이 났다. 언제나 아프지 않고 갑자기 죽을 거라는 그녀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녀의 유일한 호적상의 피붙이인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대학병원의 영안실에 그녀의 영정사진을 모시려고 사진을 아무리 찾아도 너무 옛날 사진밖에 없었다. 엄마는 아저씨가 떠나고 난 뒤 다시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너무 젊게 나온 사진을 걸어두었더니 문상을 온 사람들이 한 마디씩을 하고 갔다. “아직 청춘인데- 뭐가 그렇게 갈 길이 바빠? 이 사람아…”
밤에도 찾아오는 지인들이 간혹 있어서 나는 한숨도 자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슬픔은 한꺼번에 오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졸졸 떨어지는 수돗물처럼, 혹은 보슬보슬 내리는 보슬비처럼 천천히 오래도록 찾아왔다. 그래서 영원히 가셔질 것 같지 않은 나의 슬픔을 달래준 건 나의 연인과 그의 아픈 아내였다. 그렇게 죽는 것도 복이라고. 우리도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고, 그런 빤한 말들 외에 우리가 고인의 가족을 달래줄 수 있는 말이 또 있던가?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머니는 북으로 간 할아버지의 흔적을 지우고 살기 위해 엄마가 아주 어릴 적에 재혼을 했다. 동네 소방서장이었던 엄마의 첫 번째 의붓아버지는 엄마가 여덟 살인가 되던 해 갑자기 일어난 큰불을 끄다가 사망했다.
할머니는 그 뒤로도 두 번인가 더 살림을 차렸다. 그 시절치고는 적지 않은 횟수의 생계형 결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자식을 셋이나 여의고 남은 피붙이는 엄마 하나였다. 그나마도 오십을 겨우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누군가는 죽어서 떠나갔고, 누군가는 그냥 아무 소식 없이 집을 나갔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만날 수 없는 이산가족으로 어디선가 살아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 세상에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슬픔인 동시에 축복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를 할 때마다 엄마는 눈이 빠지라고 텔레비전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엄마가 북한에 살아계실지 모르는 친아버지를 찾는 건지, 혹은 사라진 아저씨를 찾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엄마는 그 어디에서고 아저씨를 찾았다.
“배를 타고 나가 납북되었을지도 모르잖니?” 혹은 “탈레반에게 끌려간 건 아닐까?”
오래전 아저씨가 집을 나간 때는 ‘탈레반’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동경의 어느 거리에서 엄마보다 훨씬 더 늙고 뚱뚱한,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여인을 휠체어에 태우고 걸어가던 아저씨를 우연히 만난 이후로 다시는 아저씨를 찾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엄마를 따라다니던 이별 공포증은 우울증으로 심화되어 나쁜 친구처럼 엄마 곁에 눌러 붙었다. 그녀의 유일한 식구인 내가 곁에 있어도 그 나쁜 친구는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은 다반사였고, 배가 고프다고 어린 내가 칭얼대도 초콜릿 상자를 내미는 게 흔한 일이었다.
어쩌면 아저씨도 엄마의 우울증을 견디지 못해 떠난 건지 모른다는 생각이 나는 나중에야 들었다. 혼자된 어린 내가 자신을 닮은 것 같아 불쌍해서 거두었다는 엄마는 경제적으로는 몰라도 정서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엄마의 우울증과 싸우며 어른이 되었다. 적어도 나의 재산은 건강한 몸과 정신과 마음이었다.
나는 자기 자신을 늘 불쌍하게 여기는 자기 연민을 혐오했다. 적어도 자기 연민을 벗어나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나의 인생관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갈 데 없는 어린 나를 거두어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엄마를 사랑하는 일조차 제대로 못 한 겉멋 든 박애주의자였다. 고양이 한 마리보다도 엄마를 사랑하지 못한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나는 좀체 알 수가 없었다. 엄마는 늘 우울했지만 건강했다. 그래서 그렇게 갑자기 사라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내 이름으로 옮겨놓은 아저씨가 설계한 집과 갤러리와 저금통장 등등, 나는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내 앞으로 많은 재산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차이는 별로 없었다. 나는 여전히 조금만 먹었고, 사치스럽지도 않았으며, 차 운전을 하지도 않았다. 고양이들을 위한 사료와 통조림을 더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것 말고,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자신이 부자인 걸 알게 된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호화 유람선을 타고 젊은 시절의 엄마와 아저씨의 흔적을 찾으러 산토리니 섬 여행을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