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마지막 남자 3회
나는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 남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묵례를 하며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걸 마치 영화 장면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영화장면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하긴 CD나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면 리와인드를 돌리면 되겠지만 말이다.
내 맘대로 생각해버린 것이긴 하지만, 그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묵례를 하며 내게 던지는 그의 눈인사는 “천만 번 미안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도 나도 가족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내 곁을 떠나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가 떠난 지 오 년이나 지난 그 백화점 지하 식품코너에서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그가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같이 고양이 밥을 주러 다니는 지금의 연인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문득 나는 남편과 같이했던 시간들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버린 남편보다 훨씬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고 혼잣말을 하고 나니 세상에 대한 증오심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노래방에서 만난 나의 연인은 세상에 대한 나의 증오심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를 만나는 순간, 나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였고, 누구에게나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주말이면 우리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는 그의 아내를 문병하러 갔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정성스레 그녀의 침과 눈곱을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혀 주곤 했다. 주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가끔 혼자서 그의 아내를 돌보러 가곤 했다. 6인실 병실의 그녀 침대 옆 환자 가족들이 누구냐고 물으면 사촌 언니라고 말했다. 나는 정말 그녀의 사촌 언니가 된 기분이었다. 여섯 사람의 환자들과 환자 가족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들 삶의 축도를 닮았다.
누군가는 죽어서 실려 나가고, 누군가는 온몸의 구멍마다 주삿바늘과 호스를 꽂고 새로 실려 들어오곤 했다. 오래된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은 새로 실려 들어온 환자의 보호자들에겐 늘 경험 많은 선배나 다름없었다. 오 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내 연인의 아내를 바라보며 누군가 내게 말을 던졌다. “사촌 언니라 하니 말인데, 그 신랑 설득해서 목구멍에 호스 빼라고 해요. 불쌍하지도 않아? 그렇게 더 살아서 뭐 한다고…”
나는 선인장을 가꾸듯 내 연인의 아내를 돌보았다.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되는 식물, 선인장을 닮은 그녀의 약하디약해진 가시들은 나를 찌를 수 없었다. 그녀의 남편을 내가 빼앗아 가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미안해서 나는 그녀를 더욱더 정성껏 돌보았다. 마치 그 마음을 아는 것처럼 그녀는 마음을 푹 놓은 순한 동물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나는 가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온몸을 닦아주며 혼자 울었다.
이 세상에 불쌍하지 않은 존재가 어디 있던가? 이 세상의 모든 벽들과 식물들과 동물들과 길들과 그 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사람들과 그 그림자들 모두가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비어 있는 아파트 재건축단지의 고양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고양이들을 돌보고, 병든 그녀를 돌보는 일만으로도 일주일이 모자랐다.
부모님이 남겨준 얼마간의 동산과 부동산을 지금의 엄마가 잘 관리해 준 덕분에 나는 먹고사는 일에는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대학에서는 사화복지학을 전공했고,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바람에 딱히 이렇다 할 전문직을 가질 수도 없었다. 나는 그저 가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헤아려보곤 했다. 아이들 대신 배고픈 고양이들을 돌보면서 나는 산다는 일의 지루함과 허무를 삶의 보람과 기쁨으로 바꾸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있는 그 남자의 아내를 돌보면서 나는 나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뿌듯함을 자주 느끼곤 했다.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웠다. 내 인생의 멘토를 닮은 이야기는 언젠가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었던 두 사람의 아일랜드 출신 수녀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스물 갓 넘어 한국으로 와서 소록도의 나환자들을 돌보며 평생을 보낸 팔십이 된 두 사람의 할머니 수녀들은 늙어버린 자신들이 소록도의 주민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몰래 섬을 빠져나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였다. 라디오를 통해 전해오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가슴이 뛰었다. 평생 작은 갤러리를 경영하다 나이 든 엄마는 아직도 아저씨가 어느 날 문득 문을 열고 들어설까 봐 이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혼자된 내가 왜 그 집에 들어와 같이 살지 않는지, 엄마는 늘 섭섭해하셨다. 친엄마라면 그럴까 늘 섭섭해하는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그 낡은 집 속에 아직도 떠나지 않고 들러붙어 있는 아저씨의 유령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저씨가 어느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엄마와 나를 찾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믿고 싶었다. 아저씨가 설계한 엄마의 빨간 벽돌집은 아저씨를 기다리는 엄마처럼 조용히 늙어가고 있었다. 집 가까운 데 있는 조그만 갤러리도 아저씨가 설계한 공간이었다.
예전에는 큼직하게 느껴졌던 그 공간은 차곡차곡 쌓인 그림들로 발 디딜 틈이 없게 되었다.
그 많은 그림들 속에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이 몇 점 있었다. 활짝 핀 꽃 봉우리들 속에 알알이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박혀 있는 특이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들 속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나를 떠나간 남편의 뒷모습, 아저씨와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재회하는 모습, 그 남자의 아내가 코에다 고무호스를 꽂고 식물처럼 시들어가는 모습, 그 모든 사람 풍경들이 꽃이 되어 어느 날 승천할 거라는 슬픈 약속, 나는 그 그림을 볼 때마다 꽃들이 지기 전에 내게 꼭 할 일이 남아 있다는 희망찬 생각이 들었다. 그 희망은 내가 높은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갑자기 떨어져 죽고 싶은, 내 안의 오래된 절망의 그림자를 꼭 붙들어주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