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위 새가 난다 6회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신 뒤, 큰아버지의 소식은 영영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집안의 두 어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갑자기 어른이 되었다. 갑자기 먹고사는 일이 막막해졌다. 식구들의 머리를 늘 손수 잘라주던 솜씨로 어머니는 동네에 작은 미장원을 차렸다. 커다란 메이커 헤어 살롱들의 출현으로 어머니의 벌이는 신통치 않았지만, 그런대로 네 식구의 생계는 이어갈 만했다. 그림을 잘 그리던 그는 화가의 꿈을 접고, 아버지의 평소 꿈대로 의대에 입학했다. 가장이 된 그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의 여유 없는 마음과 정신을 늘 따뜻하게 보듬어준 건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다 예뻤다. 대학 축제 때 분홍색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여린 어깨를 감싸 안고 캠퍼스 안으로 들어서면, 모든 시선이 한꺼번에 그들에게 멈추는 것 같았다. 늘 장학금을 받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해서 집안에 생활비를 보태야 했던 그는 월급날 하루를 빼고는 언제나 돈이 없었다. 가난한 그에게 맛있는 걸 사주고 영화를 보여주고 캔버스와 붓과 물감을 사준 것도 그녀였다. 푸른 바다 위에 떠가는 수많은 요트들의 하얀 돛과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오클랜드 시내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갑자기 그 시절의 그녀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 지나간 그녀의 세월이 안타까웠다. 동시에 그녀 모르게 사라진 자신의 세월도 한스러웠다. 그 가난하고 여유 없던 젊은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그는 너무도 풍족하고 행복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어딘가 펑 뚫린 마음의 구멍 사이로 찬 바람이 들이닥쳤다. 문득 어두운 곳에서 슬쩍 본 키위 새의 영상이 그녀와 겹쳐졌다. 날지 못하는 새, 그녀가 어떻게 이곳까지 날아왔단 말인가? 캄캄한 곳에서 먹이를 잡으려고 꿈틀거리는 키위 새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원래 조금밖에 먹지 않던 그녀가 낯선 이곳에서 뭐를 먹고 사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참 때늦은 걱정이었다.
그가 잠시 짧은 사랑에 빠졌던 그녀의 친구 말에 의하면 언젠가 말없이 집을 나가 강변에 하염없이 앉아있는 그녀를 어느 낯선 남자가 발견해서는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누구냐고 해도 고개를 젓고 집이 어디냐고 물어도 고개만 설레설레 흔드는 그녀가 일주일 동안 먹은 건 일곱 그릇의 짬뽕이었다. 뭘 먹겠냐고 물으면 그저 짬뽕이라고 했다. 짬뽕 일 곱 그릇을 사준 그 남자를 데리고 그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인연으로 그들은 결혼을 약속하고 한 일 년 같이 살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제정신도 아닌 여자와 같이 사는 게 어디 쉬우냐고 행패를 부리며 돈을 요구하는 그 남자를 피해, 큰 오빠가 이민을 간 뉴질랜드로 떠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도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
그는 바다에 수없이 떠있는 요트들의 하얀 돛을 바라보며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 옛날 아버지는 아마 이곳에도 닻을 내렸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상징적 부재로 그의 마음속에 살아있던 외과의사인 큰아버지가 살고 계시던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나라, 북한의 항구들만 제외하고는 이 세상 어느 항구에도 닻을 내렸을 것이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아마 큰아버지도 돌아가셨을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남북한의 가족들이 서로 만나 얼싸안고 울고 있는 장면을 볼 때마다 그는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찾지 않는 걸 보면 틀림없이 큰아버지도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집을 짓고 살았던 큰아버지의 상징적 부재는 언제부턴가 자신도 모르게 잊혀졌다. 큰아버지 탓에 자신이 운명적으로 외과의사가 되었다는 회한도 함께였다. 그는 의사 가운을 벗어버리고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그림이나 사진이 아니라면 아버지처럼 원양 어선의 선장이 되어 먼 나라들을 떠도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니 요리사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녀를 위해 맛있는 짬뽕을 만들어보리라. 이렇게 나는 여기에 살아있다. 그녀도 죽은 듯이 살아있다. 또 한 사람, 그를 원망하며 휠체어에 앉아 남은 삶을 살아가야하는 그 여환자도 살아있다. 그는 갑자기 높은 곳에 올라가 자신의 몸을 날려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