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위 새가 난다 5회
버스를 타고 뉴질랜드의 푸른 초원을 바라보며 요트의 도시 오클랜드로 이동하는 시간, 버스 속에서 가이드는 계속 말을 쉬지 않았다. 이민 온 지 7년이 되었다는 그는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이민 가려는 친한 분들 절대로 이민 보내지 마십시오. 아내는 바람나고 아이들은 엉망이 되고 남편은 무력한 키위 새 남편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잘 살아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가이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은 목수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목수 조 목수를 아십니까?” 가이드가 말하는 조 목수는 그 유명한 ‘마가렛 조’의 아버지였다. 그는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조 목수 사건을 떠올렸다.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조 목수의 일가족 살해 사건은 당대에 회자되는 떠들썩한 사건이었다. 조 목수는 손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었다. 월남전에 참전하여 그곳의 여인과 사랑에 빠져 딸을 하나 낳았다. 그녀가 바로 ‘마가렛 조’다. 딸을 하나 낳고 세상을 떠난 월남 여인을 잊지 못한 조 목수는 월남전이 베트콩의 승리로 끝나자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딸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호주 난민이 되어 호주로 떠난다. 호주에 도착한 조 목수 부녀는 한국인 이민자들의 수군대는 소리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뉴질랜드로 떠나 그곳에 정착한다. 워낙 손재주가 뛰어난 조 목수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한 건설회사 사장에게 인정을 받아 그곳의 책임자로 일하게 되고 살 만한 부를 누리게 된다. 그러자 조 목수는 한국에 두고 온 아내와 딸의 생각이 간절해져서 그들의 소식을 수소문한 끝에 자신의 아내가 보험 일을 하면서 재혼도 안 하고 딸자식 하나를 키우며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없이 미안한 마음으로 아내와 딸을 뉴질랜드로 데려온 조 목수는 어느 날 아내가 의붓딸인 마가렛 조를 엄청나게 구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사격연습과 술로 그 복잡한 심경을 달래던 조 목수는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돌아와 아내가 마가렛 조를 구박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지니고 있던 총을 술김에 휘두르다 아내와 딸을 살해하고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자살하고 만다. 아버지의 폭발하는 분노를 말리던 마가렛 조 역시 척추에 총을 맞아 영원히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된다. 거기까지는 그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베트남 여인과 한국인 조 목수 사이에 태어난 마가렛 조는 척추에 아버지의 총을 맞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 매스컴의 급작스런 인터뷰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인입니다. 한국인인 나의 아버지는 보잘것없는 베트남 난민인 나를 살리기 위해 이 낯선 나라 뉴질랜드로 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저지른 모든 일은 저를 위해 생긴 일입니다. 이 모자란 저를 거두어주신 아버지와 뉴질랜드 정부에게 감사합니다.” 그 인터뷰를 본 모든 뉴질랜드 사람들은 다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의사가 되어 세상의 아픈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다는 마가렛 조의 꿈은 장애인이 되는 바람에 무산되었지만, 그녀는 훗날 뛰어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어, 뉴질랜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큰 재산가 되었다. 지금도 그녀는 꾸준히 한국인 사회를 위해 수없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그렇게 훌륭히 살아남는데, 너는 왜 그래?” 그는 실연으로 인해 마음의 병이 들어 온 생을 허비해버린 자신의 첫사랑을 나무라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이어 말도 안 되는 자신의 뻔뻔함을 나무라며 혼잣말을 했다. “나쁜 놈”
마가렛 조의 사연을 들으며 그는 무척 오랜만에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되던 해 아버지가 타고나간 원양어선이 암초에 부딪혀 돌아가신 뒤, 시신이 빨리 돌아오지 않아 열하루 장을 치렀다. 아버지가 집을 떠날 때부터 찜찜하게 보낸 터라 그의 식구들은 슬픔보다 더 큰 감정의 물결에 휩싸였다. 거대한 죄책감이라고나 할까?
그의 아버지가 아버지처럼 따르던 큰아버지는 6·25동란 때 인민군에게 끌려 북으로 넘어갔다. 외과 의사였던 큰아버지를 아버지는 평생 잊지 못했다. 원양 어선을 타고 온 세상을 돌아다닌 이유도 어쩌면 큰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였을지 모른다. 큰아버지가 김일성대학병원의 외과 과장으로 재직 중이라는 소문이 바람에 실려 오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큰아버지의 생일인 8월이 오면, 아버지가 배를 타고 먼먼 바다로 나간 시간에도 그들 가족은 큰아버지의 생일상을 차렸다. 큰아버지를 가슴에 품은 아버지는 늘 그에게 외과 의사의 꿈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세상의 새로운 기류를 모르는 채 돌아가셨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아이들을 의사로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일도 많고 힘들고 책임질 일이 많고 골치 아픈 일은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이 세상에서 의사가 되려는 꿈은 얼마나 부질없는 꿈일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한 지 오래되었다. 큰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온 건 아버지가 배를 타고 떠나 세상을 등진 얼마 전의 일이었다. 소위 남파 간첩을 통해 큰아버지의 연락을 받은 할아버지는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에게 지금부터 한 시간 내에 내 집을 떠나지 않으면 경찰에 연락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밤중에 할아버지를 찾아온 남파 간첩은 큰아버지는 풍문대로 김일성대학병원의 외과 과장으로 잘 지내고 계시다는 안부와 함께 만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겠냐는 방법론을 모색하자는 안건을 일단 건의한 모양이었다. 한밤중에 찾아온 낯선 손님은 몇 년 전 죽을 목숨을 큰아버지가 구해주었다는 고마운 인사도 함께 전했다. 이후로 소식은 또다시 끊겼고 아버지는 큰아버지를 잘 아는 손님을 그렇게 무정하게 돌려보냈다는 원망 비슷한 푸념을 하며 또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갔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배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과 큰아버지의 소식은 사실상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죽음이 그 낯선 손님의 출현 때문이라는 망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할아버지는 무척 더웠던 다음 해 8월에 세상을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