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위 새가 난다 4회
그녀의 친구와 석 달간의 짧은 사랑에 빠졌던, 그 생각만 하면 그는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말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라는 공통분모가 그들 사이를 가깝게 했고, 어쩌면 그는 그녀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잃어버린 그 옛날의 자기 자신을 찾고 있던 건지도 몰랐다.
바로 적절한 순간에 그녀의 친구가 나타나, 어쩌면 그녀가 먼저 그에게 서로의 외로움을 나누자는 신호를 보냈던 건지도 몰랐다. 애초에 그녀를 경제적으로 혹은 어떤 식으로든 돕고 싶다는 그의 메시지는 그녀 친구를 통해 그녀의 어머니에게 전달되었으나 거절당했다.
그의 탓이 아니니 잊어달라는 그녀 어머니의 단호한 대답만 돌아왔을 뿐, 언제부턴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는 친구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파리에 있다는 설과 정신병동에 장기 입원 중이라는 설과 마지막으로 들은 게 큰 오빠를 따라 뉴질랜드로 갔다는, 실체는 없는 그림자만 무성한 소문들이었다. 무척 오래전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다는 그녀 친구의 기억은 그의 상상력을 열 배로 증폭시켰다. 중학교 미술교사인 그녀 친구의 화실로 찾아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너 조총련이 밀어준다며? 조심해.”
아마 그가 찾고 싶었던 건 그녀도 아니고, 시시한 연애 감정도 아니고, 바깥세상과 격리되어 영원히 시간이 정지한 듯한 화실의 분위기였던 건지도 몰랐다. 오래전에 이혼하고 화실과 학교 사이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그녀 친구의 화실에서 그는 오랜만의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죄의식 때문이었을까?
그녀라는 공통분모가 점점 흐릿해지면서 그들이 나누었던 외로움은 애초보다 두 배 세 배 열 배로 증폭되었을 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식이 뜸해졌고, 그들은 만난 적조차 있었나 싶게 모르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는 그녀가 남았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퀸즈 타운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일행은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 북섬을 향해 떠났다. 뉴질랜드 북섬은 남섬보다 거창하게 아름다운 볼거리는 적었지만, 찾아주는 눈길을 기다리는 소소한 아름다움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건 자연이 만들어놓은 걸작품이라 불리는 와이토모 동굴 안에서 보트를 타고 깊숙이 들어가 본, 동굴 천정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반딧불들이었다. 반딧불들이 놀랄까 봐 사진도 찍을 수 없고 아주 작은 소리도 내면 안 되는 완전한 침묵이 그를 사로잡았다. 살아있는 반딧불들은 중세 유럽의 성당 천정벽화에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은 게임도 되지 않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는 마음의 카메라로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놀래지 마. 나는 너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거야.” 그가 보낸 메시지가 반딧불들에게 도착했을까? 그 옛날 처녀인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며 그녀에게도 그렇게 마음속으로 말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몇 번이고 그렇게 자신에게 다짐했을 것이다.
그녀가 아이를 가졌을 때도, 중절 수술을 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설렁탕 집에 앉아 다짐했을 것이다.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하겠노라고. 하지만 모든 일이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변해 어느 날 그는 지금의 아내를 향해 사랑편지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지금의 아내는 씩씩하고 현명하고 단호한 여자였다. 잔소리 같은 건 할 줄도 몰랐고, 시집에 다달이 적지 않은 돈을 보내는 일에 대해서도 아무런 불만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 대신 아내는 가끔 얼음처럼 차가웠다. 자신이 바쁘다 싶으면 아예 그를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딸을 하나 낳고 나서는 상의도 하지 않고 불임수술을 혼자 가서 해버렸다. 그는 아내의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 그리고 가끔은 자신이 그녀를 버린 벌을 받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딧불들을 바라보며 그의 생각은 끝도 없이 과거를 향해 날아갔다.
아쉬운 마음으로 동굴을 나와 일행은 폴리네시안 노천 유황 온천으로 유명한 ‘로토루아’를 향해 떠났다. 하지만 어떤 피부병도 다 낫는다는 영험한 유황 온천보다 그의 뇌리 속에 남은 건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 족의 민속 마을 키위 관리센터에서 처음 본 키위 새의 모습이었다. 그 어두컴컴한 실내로 들어가기 전에 가이드는 뉴질랜드의 상징인 키위 새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날지 못하는 키위 새는 날개의 흔적이 깃털 안에 숨어 있습니다. 앞을 잘 못 보는 키위 새는 밝은 낮에는 캄캄한 굴속이나 삼림에서 서식하고, 밤에는 지렁이나 곤충들, 유충들 등 먹을 것을 찾으러 다닙니다. 시각이 퇴화하면서 후각이 발달되어 먹이를 코로 찾습니다. 뉴질랜드에서만 서식하는 키위 새는 다른 조류의 체온이 39도에서 42도 사이인 데 비해 인간과 똑같이 37도에서 38도의 체온을 유지합니다. 수명은 30년에서 60년 정도이고, 뉴질랜드의 국가보호조류로 구분되나 현재는 국제 보호조류에 속합니다. 삼천 만 년 전에 뉴질랜드에 들어와 빙하기를 거치고 여러 지각변동을 견디며 현재의 키위로 거듭났습니다. 필요하면 빨리 달릴 수도 있고 포획되었을 때는 발톱을 방어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암컷은 자기 몸의 삼분의 일이나 되는 450그램의 큰 알을 굴속에 낳고 수컷이 약 80일간 알을 지킵니다. 새끼는 깃털이 나고 눈을 뜬 상태로 부화하며, 일주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습니다.”
일행은 공원 안쪽에 컴컴하게 만들어놓은 인공의 정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새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날지 못하는, 날개가 퇴화된 키위 새는 뉴질랜드 정부의 철저한 보호 관리 아래 멸종위기를 벗어나 이 땅에 살아남은 새였다.
그는 그녀도 키위 새처럼, 이 땅에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기를 마음속 깊이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