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위 새가 난다 3회
이대 정문 앞에서 신촌 로터리로 가는 길목, 작은 3층짜리 건물 2층에 그녀의 화실이 있었다. 어쩌면 그녀와 함께 그 화실에 숨어 있던 시간들이 그의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들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하루가 꽉 찬 학교 수업과 대학입시수험생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 일로 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주말에는 늘 그녀를 향해 화실로 달려갔다. 그는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너무 행복했다. 사과와 배와 화병에 가득 꽂혀 있는 꽃들과 그녀의 얼굴과, 그리고 그녀의 나신도 그렸다. 화실 밖 거리에서는 쩍하면 데모를 하는 학생들의 무리가 이리저리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메케한 최루탄 냄새가 온 거리를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그들만의 밀실이던 화실의 닫힌 창문 사이로 구공탄 연기처럼 조용히 스며들던 날들에도 두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것과는 아무 관계없이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한 쌍의 바퀴벌레들이었다. 창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들은 그림을 그리고, 라면을 끓여 먹고, 소주를 마시고, 격렬한 몸짓으로 서로를 껴안았다. 가끔 그녀의 친구들이 몰려와 화실 문을 두드릴 때마다 그들은 죽은 듯이 납작하게 드러누워 아무도 없는 척했다.
그녀들은 한참 문을 두드리다가 포기하고 돌아가기 일쑤였다. 쥐 죽은 듯 고요하게 납작 엎드려있던 짧은 침묵의 시간이 지나가면 그들은 무쇠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의과 대학생들은 직접 데모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학생들은 응급차에 구급약을 싣고 데모하다 다친 학생들 곁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원양 어선을 타고 낯선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탄 배가 암초에 부딪혀 침몰해 돌아가신 뒤로, 기울어가는 집안의 너무 잘난 장남이던 그는 데모 같은 건 그 마지막 줄에도 서지 않았다. 그는 시간이 멈춘 듯한 뉴질랜드의 그 한국 음식점에 앉아 오래된 노래들을 들으며, 요즘 부쩍 자주 꾸는 꿈이 떠올랐다.
그 꿈은 나이 들어가는 그녀의 얼굴에 휠체어를 탄 여자의 하반신이 마비된 몸이 합쳐진 합성 사진의 이미지였다. 둘이면서 하나인 그녀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깊이 증오하는 존재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웬만큼 선이 굵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사실은 굉장히 불편한 진실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헤어진 이후로도 오래도록 그를 잊지 못하긴 했지만, 그를 단 한 순간도 증오한 적은 없었다. 그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그가 외과를 택한 건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 외에도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외과 수술의 가시적인 힘에 매력을 느낀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생각처럼 수술이 잘 되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었고, 기껏 잘했다고 생각한 수술이 엉뚱한 합병증으로 인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경우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중에서 그의 기억 속에 가장 잊히지 않는 건 몇 년 전 일흔 살 된 노인의 가벼운 뇌졸증을 치료하기위한 감압술의 후유증으로 출혈로 인해 혈전이 뇌를 막아 사망한 경우였다. 나이보다 훨씬 정정하셨던 노인의 죽음은 그 후 오래도록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일이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실수였든, 어쩔 수 없는 합병증의 후유증이었든, 의사인 그 자신의 나쁜 일진과 환자의 나쁜 일진이 공교롭게 겹친 재수 없는 그날의 운세 때문이었든 간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소송에 이겼든 졌든 그는 이미 무언가 절대적인 것에 의해 거대한 망치로 흠씬 두드려 맞은 기분이었다. 무언가 그 안에서 죽고 또 다른 무언가가 그 안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하반신이 마비된 중년의 여 환자는 그와 비슷한 나이 또래였다. 몸을 못 쓰게 된 환자와 평생 마음에 병이 든 그의 하나뿐인 첫사랑 그녀, 그 둘 다 엄격히 말하면 모두 그의 탓이라면 다 그의 탓일지도 몰랐다.
정신없이 바쁘게 산 세월 동안에도 그녀를 아주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그녀와 4년 열애 끝에 같은 과 후배였던 지금의 아내와 돌연 결혼하는 바람에 마음을 다친 그녀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후로 어쩌면 지금까지 그녀의 마음에는 캄캄한 커튼이 내려쳐 졌고, 호기심 많은 몇몇의 남자들이 그 커튼을 들추고 기웃거렸지만, 아무도 그녀의 마음의 병을 고쳐줄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게 다 그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실연을 했다고 평생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마음의 병이 낫지 않는다면, 이 지구상에 제정신으로 살아갈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후로도 술이 적당히 들어가거나 비나 눈이 많이 오는 날, 아주 가끔 그는 그녀를 떠올렸다. 마음이 슬쩍 불편해지려고 할 때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의 질병 유전자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결론으로 생각을 끝내곤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녀를 떠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굳이 말하자면 그냥 갑자기 그녀가 싫어졌다. 아니 그보다도 같은 의사인 지금의 아내가 삶의 동반자로서 훨씬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부잣집 딸내미였던 그녀의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고, 안 그래도 비현실적이고 감상적인 그녀의 변화무쌍한 감성이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커다란 창에서 강이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하염없이 앉아있는 그녀와, 공주 같은 옷을 입고 불편한 하이힐을 신고 공주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그녀와, 조금만 심한 말을 해도 깨질 것처럼 상처받는 여린 심성의 그녀와, 도저히 같이 살아낼 자신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무조건 좋아 보였던 그녀의 모든 것이,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는 나라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초라한 공주처럼, 그녀는 그의 마음 안에서 소리 없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녀로부터 수없이 편지가 왔지만 답장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 뒤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된 건 수년 후 길에서 그녀의 가까운 대학동창을 우연히 만났기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 가깝게 지냈던 터라 반가운 마음이 앞섰고, 그녀와 함께 커피집에 들어가 두서없이 그녀의 안부를 물었던 것이다.
사실 같은 의사인 아내 덕에 집에다 생활비를 보태고도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될 무렵, 그 무렵부터 그의 마음 깊이 묻혀 있던 그녀가 마음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궁금하던 차에 그녀의 친구를 우연히 만난 건 필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와 헤어진 몇 년 뒤 그녀는 파리로 유학을 갔다고 했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라고도 했다. 파리로 간 그녀는 그녀를 쫓아다니던 미술 학교 유학생과 동거를 했다고 했다. 그 옛날 그가 그려준 그녀의 초상화를 품에 안고 하도 우는 바람에, 그녀와 같이 살던 그 미술 대학 유학생은 한밤중에 도망을 갔다고도 했다. 그렇게 슬픈 사연을 듣고도 그가 기껏 한 짓은 그녀의 슬픈 소식을 전해 준 그녀의 친구와 잠시 짧은 사랑에 빠진 거였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친구와 첫 정사를 치르며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을 향해 뇌까렸다.
"나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