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위 새가 난다 1회
"여기는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의 '헤글리' 공원입니다.
잠결에 한국인 가이드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렇게 졸다가도 버스에서 내려 심호흡 한 번 하고 나니 시내 중심을 흐르는 에이번 강의 물결이 목마른 그의 마음을 축여주는 듯했다. 사람 키의 몇십 배는 될 듯한 공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들렸다.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이승에서는 볼 수 없을 듯한 나무들이 울창한 가지와 잎새들을 거느리며 아무런 부족함도 거리낌도 없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나뭇잎들의 미세한 떨림이 카메라 렌즈에 잡혔다. 문득 그는 손의 떨림과 나무 잎새의 떨림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수술을 할 때의 그 자신의 긴장과 환자의 세포의 떨림이 마주 하고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한 공원에 수국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수국의 천국이라 이름 붙여 마땅한,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수국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의 눈에 꽃 속의 뼈들과 가는 신경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뼈 없는 꽃들 속에조차 뼈와 신경이 있는 것이다. 수국들 속의 뼈가 거대한 이름 모를 천상의 나무들의 뼈와 신경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공룡들의 뼈와 신경을 생각나게 했다. CT촬영으로 투시된 사람의 안을 들여다보듯 그는 꽃들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많은 수국들 중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볕이 잘 안 드는 한 귀퉁이에서 혼자 꽃을 피우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초라한 모습으로 시들어가는 날긋날긋하게 빛바랜 푸른 색 수국이었다. 카메라 렌즈를 가까이 들이대며 그는 문득 그녀를 생각했다.
한 때는 참 예뻤던 수국 한 송이를 떠올렸다. 봄바람에 조용히 휘날리던 땡땡이 무늬의 그녀의 분홍색 원피스 자락이 그의 눈앞에서 흔들리는 듯했다. 그녀를 떠올린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와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왜 이제야 그런 생각이 난 건지 자신의 무심함이 스스로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자신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나쁜 놈."
의사인 그가 스무 살 무렵 가장 하고 싶던 일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의과 대학을 다니던 시절, 선배들로부터 작금의 세상은 골치 아픈 외과의사가 한물가고 성형외과나 안과 의사가 각광받는 시대라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외과를 선택한 건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의사 중에서 꽃 중의 꽃은 수술을 하는 외과 의사라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아들이 훌륭한 외과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던 아버지는 원양 어선을 타는 선장이었다. 하지만 요즘 의사인 그가 가끔 꾸는 꿈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먼 나라들을 한없이 헤매는 꿈이었다.
그는 일 년 내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뉴질랜드의 거대한 식물원을 거닐며 왜 이렇게 옛날 생각이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는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댔다.
스무 살 무렵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하던 그가 몇 년 전부터 갖게 된 취미는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학회를 갈 때마다 혹을 일부러라도 틈을 내서 세상 이곳저곳의 풍경들을 찍어 지인들만 초대해서 두 번의 조촐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후 얼마 동안, 진실로 행복했던 순간들은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수술실 밖을 나오자마자 환자 가족들이 고맙다고 온몸을 기울여 하는 진심 어린 인사를 받을 때였다. 혹은 온몸이 마비되어 걷지도 못하던 환자가 수술 후 온몸을 꼼지락거리며 드디어는 걸어서 병원을 나가며 건네는 진심 어린 고마운 인사를 들을 때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이 외과의사가 된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수술하는 일이 일상이 되고 보니 그런 감흥들이 없어지고 무뎌졌다. 그래도 적어도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는 외과 의사가 된 걸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어릴 적부터 다리에 심하지 않은 마비를 앓고 난 뒤 어른이 된 뒤에도 보통 사람들처럼 정상적인 보행을 하지 못하는 환자를 수술한 적이 있었다. 수술한 당시는 별문제가 없었다. 재활의학과에서 한동안 치료를 받으면 정상인처럼은 아니더라도 평소보다 훨씬 수월한 보행이 가능할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
문제는 절뚝거리면서라도 걸어서 제 발로 들어왔던 환자가 영원히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데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차도가 없자 환자는 그와 병원을 상대로 의료 사고 소송을 했다. 병원 측이 그의 커다란 방패막이가 돼주어 소송은 이기는 걸로 끝이 났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조금도 가볍지 않았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재수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그가 수술 전 환자 가족들에게 늘 말하듯 확률이란 아무리 희박해도 당하는 사람에겐 백 프로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그는 말이 아닌 사실로 체험했다.
사람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그는 유능한 신경외과 의사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그 일로 인해 별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신에 마비가 온 그 환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터넷에 갖은 악플을 다 올리고 있었다. '히포크라테스 정신에 위배되는 악덕의사를 고발한다.' 그렇게 시작되는 인터넷 댓글을 그는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전히 그의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들은 줄을 섰고,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그는 예전과 달라졌다.
그즈음 그는 아버지처럼 배를 타고 나가 먼 나라들을 헤매고 싶은 꿈에 시달렸다. 그때부터 그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싶은 그림은 아니더라도 사라져가는 순간을 곤충 채집하듯 박제시키는 사진 찍는 일이 그는 많이 행복했다.
생각해보니 스무 살 이후 그가 처음 찍은 사진은 그림을 그려보려고 찍은 그녀의 얼굴 사진이었다. 스무 살 그녀는 참 아름다운 여자였다. 대학교 일 학년 첫 미팅을 나갔을 때 그는 그녀에게 홀딱 반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행복한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