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에 관한 명상 9회
사람에 따라서는 무기수가 되는 것보다 사형수가 되는 걸 선택하고 싶은 사람들의 유형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녹아내리는 눈사람처럼 다가올 끝장을 기다리며 사느니, 스스로 끝장을 내버리길 원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추적추적 늦가을비가 내리는 오후, H를 향해 내가 위로랍시고 웃으면서 던진 말은 기껏 이런 정도였다.
“에이, 정말 죽을 사람은 어떻게 죽는 방법이 제일 쉬운지 그런 말 하지 않아요. 그냥 아무 말 없이 콱 떨어져죽든지, 목을 매달든지, 독약을 삼키든지, 욕조에 들어가 정맥을 칼로 긋든지.” 그렇게 타인의 죽음에 관한 여유 있는 농담을 던진 건 H를 괴롭히는 ‘파킨슨씨 병’이라는 게 금세 죽는 악성 종양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H는 남의 이야기 하듯, 무엇보다도 나무의 해충들을 죽이는 데 뿌리는 제초제를 마시는 게 괴롭긴 하지만 한 방에 끝내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가장 심각한 일생일대의 커다란 사건이지만, 한 발만 뒤로 물러나 바라보아도 그렇게 심각하지도 않고 슬퍼할 것도 없는, 심지어는 웃기기까지 하는 사건이다. 우리 모두의 유보된 죽음은 타인의 죽음보다 빠르거나 늦어질 뿐, 그 아무도 죽음을 피해 뒷골목으로 도망을 가서 영원히 죽지 않는 나라의 비행기 티켓을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은 당신이 조금 먼저 가는 것뿐이라는 둥, 나도 언젠가 당신과 똑같은 상황에 놓여 지금의 당신의 심정을 떠올릴 날이 올 거라는 둥, 그렇게 지당하면서도 쓸데없는 말들밖에는 없을 것이다. 가을비인지 겨울비인지는 계속 내렸고, 세상의 자동차 바퀴들에게 무참하게 밟히며 질기게 삶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길가의 은행잎들이 비에 젖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 점심을 먹고 나서 그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밥값을 치렀다. 내 생애 단 한 번만이라도 나는 그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게 밥은 이미 밥이 아니었으며, 자장면은 자장면이 아니었을 뿐, 밥도 자장면도 그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의 한 조각이었을 뿐이다. 못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H는 아주 더디게 호텔 입구에 선 택시에 올라탔다. 차 창문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너도 같이 가자” 그러는 것 같았다. 그는 나와 함께 어디로 가고 싶었을까? 가까운 서해 바다나 먼 남해 바다나 아니면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더 이상은 따라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의 끝자락까지만이라도, 혼자 가기 싫은 사람의 절절한 외로움이 그가 탄 자동차의 뒷모습까지 노랗게 물들였다.
H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배웅한 뒤, 나는 삼촌의 아내에게 벼르고 별렀던 전화를 했다.
반가워하는 전화 속의 그녀 목소리는 어제 들은 듯 낯익었다. 아주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 그녀의 희고 둥근 얼굴과 정겹게 느껴지는 포근한 살집이 기억 속에 가물거렸다. 기억 속의 동그랗고 커다란 선해 보이는 두 눈은 겁이 많아 보였지만, 마음속은 차고 깊은 호수처럼 바닥이 보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이 군에 입대하기 전에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녀가 정한 약속 장소는 연희동에 있는 맛있다고 소문난 오래된 중국 음식점이었다. 점심때도 자장면을 먹었다고 말하려다가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릴 적, 내가 자장면을 좋아하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예약이 되어 있는 방문을 열자마자, 동그란 식탁에 둘러 앉아있는 그녀와 삼촌 아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거짓말처럼 어릴 적 보았던 젊은 삼촌이 앉아있었다.
“삼촌 오랜만이야, 정말 보고 싶었어” 나는 목이 메어 그렇게 말할 뻔했다. 환하게 웃으며 삼촌의 아들이 나를 반겼다. 그 웃음이 정말 삼촌을 닮았다. 우리는 그동안 가끔 보고 살았던 가까운 친척들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홍대 앞에서 소문난 떡볶이집을 운영하는 삼촌의 아내는 이제는 먹고 살 걱정도 없고 살 만하다고 했다. 돌아간 남편이 남겨준 집도 한 채 있고 분식집 가게 터도 본인 거라 월세도 나가지 않는데다가, 사람들이 떡볶이를 사먹으려고 줄을 설 만큼 유명한 분식집이 되어 걱정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돌을 던져도 파문이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의 심연처럼 고요했다.
우리는 그 집에서 제일 잘한다는 요리인, 해삼으로 새우를 돌돌 말은 ‘오룡 해삼’과 닭 깐풍기를 시켜 먹고 결국에는 또 자장면을 시켰다. 속으로는 짬뽕을 시켜야지 하면서도 결국 주문하는 것은 또 자장면이었다. 그날 먹는 두 그릇째의 자장면이었다. 몇십 년의 역사를 지닌 뛰어난 맛을 자랑하는 추억의 자장면 맛이었다. 삼촌의 아내는 어릴 적에 내가 자장면을 참 좋아했는데, 지금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삼촌의 아들을 향해 “너도 자장면 좋아하니?” 하고 묻자 그가 말했다. “좋아하지만 잘 안 먹어요. 어머니가 건강에 안 좋다고 중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셔서요. 오늘은 진짜 오랜만에 제가 졸라서 온 거예요” 했다. 나와 삼촌의 아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도 그녀는 자장면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삼촌이 워낙 좋아해서 가끔 같이 먹기는 했지만, 삼촌이 세상을 떠난 이후 자장면을 거의 먹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가 소실점 너머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열한 살 땐가? 연휴가 이어지던 일요일 저녁, 그날따라 어머니는 오한이 든다며 이불을 쓰고 누워 있고 아버지는 우리 삼 남매를 바라보며 중국음식이나 시켜먹자 하셨어요. 아버지가 “뭐 먹을래?” 하고 물으니까 우리 삼 남매는 너도나도 “자장면하고 탕수육”하면서 합창을 했어요. 내 기억에 아버지는 “만날 먹는 탕수육은 말고” 하시면서 팔보채 한 접시하고 자장면 세 그릇과 물만두 한 접시를 시켰어요. 음식이 오자 마음이 변한 내가 “나는 물만두 먹을래” 하니까 아버지는 그러라고 하시면서 자장면 그릇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갔어요.
빈 그릇에 자장면의 반은 나를 덜어주고 남은 자장면과 팔보채 몇 젓가락을 드신 아버지가 반주로 소주도 두어 잔 드신 다음 “갑자기 내가 왜 이렇게 어지럽니?” 하시더니 땅바닥에 주저앉았어요. 누워 있던 어머니가 놀라 방에서 뛰어나왔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데리고 병원에 가려고 옷을 챙겨 입지도 못하고 길거리로 나왔는데,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병원마다 연휴에다 공휴일이라 어느 병원도 문을 열지 않았더라고요. 열지도 않은 병원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지금처럼 119구조대도 없었던 그 막막한 저녁에 아버지는 택시 속에서 어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 이후로 나는 중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우리는 모두 자장면에 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시험을 잘 보고 난 뒤 아버지가 사주시던 특별 음식으로. 부잣집 아이들이나 먹을 것이 흔한 요즘 아이들에게는 출출할 때 생각나는 그리운 추억의 불량음식으로. 삼촌의 아내에게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드셨던 목이 메는 음식의 기억으로, 그리고 내게는 아버지의 꿈속에 나타나는 삼촌의 기억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 일찍 삼촌의 아내 곁을 떠나갔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은 돌을 던져도 아무런 파문이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고요한 것이리라. 세상 아무것에도 미련이 없는 표정, 그저 지금 이 순간 지구를 떠나라 해도 감사한 마음으로 갈 길을 떠나가는 표정, 준비된 표정, 선하고 성실한 표정, 남에게 아무리 작은 피해도 주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표정, 장안에 소문난 떡볶이를 만드는 사람의 표정, 불량식품은 절대 만들지 않는 사람의 표정, 그 표정을 바라보며 나는 다음에는 꼭 소문난 떡볶이를 먹으러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들 모자와 헤어졌다. 비가 온 뒤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것 같은 싸늘한 11월 밤이었다.